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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을 넘어, 부천이 만든 새로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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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4. 17. 08:07

부천FC, 창단 이후 첫 제주전 승리… 코리아컵서 1-0 극적 결승골
연고 더비의 뜨거운 감정선, 과열된 접전 끝에 부천의 환호
부천 제주
후반 14분, 부천의 한지호와 제주 골키퍼 안찬기가 충돌하며 양 팀 선수들이 몰려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2006년, K리그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었다. 당시 K리그 소속이던 부천SK는 여러 현실적 고민 끝에 연고지를 제주도로 옮기며 새로운 출발을 택했다. 관중 감소와 구단 운영 문제, 지방 분산 정책 등이 겹친 복합적인 결정이었다. 구단 입장에선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부천이라는 도시는 하루아침에 팀을 잃었다. 시민과 함께 걸어온 구단이라는 상징, 지역의 자부심과 정체성은 순식간에 공중에 흩어졌고, 팬들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부천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팬들이 주도해 새로운 시민구단 창단 운동이 전개됐고, 2007년 부천FC1995가 출범하면서 그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축구팀을 되찾았다. 프로축구 역사상 가장 뼈아픈 연고 이전을 겪은 도시가 다시 피워낸 자생의 사례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9년이 흐른 2025년 4월 16일, 그 오랜 기억 위에 마침내 작지만 의미 있는 위로가 얹어졌다. 부천FC1995가 하나은행 코리아컵 3라운드에서 제주SK를 1-0으로 꺾고, 구단 창단 이후 처음으로 '제주전 승리'를 기록한 것이다.

이 경기는 단순한 토너먼트 경기를 넘는 특별한 의미를 품고 있었다. 부천 팬들에게 이날은 단순한 한 경기 이상, 지난 시간을 복기하고 정체성을 되새기는 '그날'이었다. 주중 수요일 저녁 경기였음에도 부천종합운동장은 열기로 가득 찼다.

경기 시작 전부터 서포터석에는 '우리는 남았고 부천은 살아남았다', 'ONLY BUCHEON ALWAYS'라는 플래카드가 걸렸고, 과거 부천SK 시절 외쳤던 '오! 부천SK' 대신 '오! 나의 부천'이라는 새로운 응원이 경기장을 울렸다. 그라운드 안팎으로 이 경기는 상징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고, 이영민 감독 역시 "지나가는 하나의 경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팬들에겐 오래도록 회자될 경기"라며 선수들에게 남다른 각오를 요구했다.

경기 전부터 양 팀은 분위기에서 차이를 보였다. 부천은 시즌 초반 K리그2에서 3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순항 중이었고, FA컵 2라운드에서는 여주FC를 3-1로 꺾으며 기세를 올린 상태였다. 반면 제주SK는 K리그1에서 최근 5경기 1승 1무 3패로 부진에 빠져 있었다. 전력상으로는 제주가 우위에 있었지만, 분위기만큼은 부천이 앞섰다. 이영민 감독은 경기 전 "팬들이 기다려온 경기인 만큼, 리그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다"며 바사니, 갈레고 등의 전략적 교체 투입을 예고했다.

치열했던 경기
양 팀의 치열한 경기 양상은 수차례 경고로도 드러났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경기 내내 팽팽한 흐름이 이어졌다. 공방이 거듭되며 긴장감이 고조됐고, 마침내 후반 14분 경기의 열기는 감정 싸움으로 번졌다. 부천 공격수 한지호가 제주 골키퍼 안찬기와 신경전을 벌이다 충돌했고, 이를 계기로 양 팀 선수들이 몰려들며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상징성이 짙은 맞대결이기에, 감정의 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영민 감독은 "선수들에게 책임감을 갖고 운동장에 들어가자고 했다"며 이 경기에 담긴 감정의 무게를 인정했다.

이후 부천은 경기 흐름을 정리한 뒤, 후반 31분 바사니와 갈레고를 투입하며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후반 40분, 기다리던 장면이 펼쳐졌다. 갈레고의 왼발 중거리 슈팅이 안찬기의 손끝에 걸렸지만 완전히 잡히지 않았고, 문전으로 쇄도하던 이의형이 재빠르게 달려들어 기습적인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부천 구단 역사상 제주전 첫 득점이자, 팬들에게는 오랜 한을 씻는 설욕의 순간이었다. 이의형은 시즌 초반 천안전 득점 이후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성실한 재활 끝에 이날 복귀전에서 다시 팀의 영웅이 됐다.

종료 직전, 부천은 페널티킥을 얻었지만 바사니의 킥이 안찬기 골키퍼에게 막히며 격차를 벌릴 기회는 놓쳤다. 하지만 한 골이면 충분했다.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선수들과 팬들이 하나 되어 터뜨린 함성은 그 자체로 승리의 의미를 증명했다. 지난 2020년 제주가 K리그2로 강등되며 세 차례 맞붙었을 때 모두 패했던 기억이 이날로써 비로소 지워졌다. 그때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무관중 경기였지만, 이번에는 팬들이 직접 지켜보는 앞에서 얻은 값진 승리였다.

부천 이양민 감독
제주전 승리 후 인터뷰에 응하는 부천FC 이영민 감독.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경기 후 이영민 감독은 "팬분들이 가진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었다면 다행이다.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줘 고맙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이의형, 바사니, 갈레고의 투입 시기를 철저히 준비했고, 예상대로 경기가 흘러갔다"며 전술적 만족감도 드러냈다. 특히 이의형에 대해서는 "재활에 성실히 임하며 시즌 초반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려 노력해온 선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하진 않았다. 바사니의 페널티킥 실축은 아쉬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영민 감독은 "우리 팀 페널티킥 1번 키커는 바사니다. 다음에도 그에게 맡길 것"이라며 흔들림 없는 신뢰를 보였다. 이어 "오늘 경기는 팬들의 마음을 돌보는 경기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건 이틀 뒤 성남FC와의 리그 경기다"라며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이날의 승리는 기록상으로는 단 한 경기일 뿐일지 모른다. 하지만 부천에게, 그리고 그 팀을 19년 넘게 지켜본 팬들에게는 그 이상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사라졌던 이름을 다시 되찾고, 떠나간 시간을 붙잡아낸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부천은 남았고, 살아남았으며, 끝내 이겼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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