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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조셉 스탈린: 야누스(Janus) 같은 두 얼굴의 리더십(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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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4. 13. 17:52

강성학 웹용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레닌의 장례식을 치른 4개월 후에 레닌의 미망인인 크루프스카야가 손에 '폭탄'을 들고 중앙위원회에 참석했다. 그것은 스탈린을 비난하고 트로츠키를 그의 후계자로 임명하는 자기 남편의 마지막 유언과 증언이었다. 그것이 다가오는 당 대회에서 공개되어야 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큰 소리로 낭독되어야만 했다. 무서운 당혹감이 참석자 모두를 마비시켰다. 연단에 조용히 앉아있던 스탈린은 작고 비참해 보였다. 그의 운명이 걸려있었다. 지노비프가 서둘러 스탈린을 구출했다. 지노비프는 위대한 레닌의 유언을 결코 무시할 사람이 아니지만 장례식 후 4개월은 분명히 사무총장에 대한 레닌의 두려움이 근거 없음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면서, 그러므로 그 유언을 공개해서 불필요한 스캔들로 당을 해쳐야 하느냐고 물었다. 카메네프도 동의했다. 중앙위원회는 40 대 10으로 그 유서를 파일로 만들고 잊어버리기로 결정하였다.

제15차 전당대회에서 트로츠키, 지노비프 그리고 카메네프의 3두마차는 스탈린의 비난으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트로츠키는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고 그를 지지한다고 의심받는 수만명의 당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노비프와 카메네프는 시골의 작은 직책으로 쫓겨났다. 1929년 스탈린은 분노하여 트로츠키를 소련연방으로부터 추방령을 내리고 그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두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대항하는 세계여론을 조직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아들, 자매들, 그리고 다른 친척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크하린은 지노비프를 규탄한 보상으로 코민테른의 통제권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누가 진정으로 크레믈린을 지배하는가에 대한 의심은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도 없었다. 명성에 취한 스탈린이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을 마르크스와 레닌의 정치이론들의 단순한 집행자가 아니라 창의적 사상가로 자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그가 말한 것의 정반대 행동을 하거나 그가 행한 것을 정반대로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당의 우익과 공모하여 좌익의 반대파를 파괴했다. 그는 중도파와 공모하여 우익의 반대파를 파괴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러시아에서 계급을 타파했을 때 공산당은 사명을 완수하고 사라지도록 허용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그러나 그는 크레믈린에서 당을 확고하게 자리 잡게 했다. 그는 소련에서 유일한 독재가가 된 것이다. 1929년 모스크바는 거대한 퍼레이드로 스탈린의 50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모스크바의 벽들은 그의 거대한 초상화로 덮였고 그의 동상과 흉상들이 광장과 공공 건물들을 가득 채웠다. 표지판과 깃발들은 이렇게 선포했다. "스탈린은 10월 혁명의 영웅이다… 스탈린은 오늘의 레닌이다."

이제 더 이상 권력을 위한 국내적 투쟁에 전력투구하지 않게 된 스탈린은 러시아의 외교정책에 더 많은 관심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노련하고 인기 있는 외상인 마심 리트비노프(Maxim Litvinov)에게는 당황스럽게도 스탈린은 소련의 외교를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세계정세에 대한 그의 파악은 부적합했다. 그리하여 1928년 7월 13일 그는 경쟁적 자본주의 강대국가들로서 미국과 영국 간의 임박한 전쟁을 자신 있게 예측했다. 그해 그는 코민테른을 직접 장악하고 모든 외국 공산당들에게 모스크바로부터 당의 노선을 엄격히 따르도록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오직 소련만이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마르크시스트 리더십을 제공하도록 신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트로츠키처럼 세계혁명을 일으킬 원대한 희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해외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충성을 자기에게 바치게 하려면 그들이 트로츠키의 진영으로 넘어가 강력한 반-스탈린 운동을 돕게 할 수는 없었다. 해외 주구들의 통제도 역시 소련정책에 부합하게 조작할 서방국가들에 있는 제5열을 그에게 제공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공산당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으로 혁명적 위기가 발생하자 스탈린은 그것이 세계 모든 자본주의 종말의 시작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이 그 해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스탈린은 그들이 너무 느리고 겁먹고 움직인다고 꾸짖었다. 공산주의의 세계지도자로서 스탈린의 위신을 거의 망가뜨린 외교정책적 실수는 중국의 혁명군을 이끌도록 장제스라는 젊은 군 장교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장제스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러시아의 군사적 방법으로 훈련시켜 새 국민당 군대를 위해 장교단을 발전시키라고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당시에 천두슈(Chen Tu-hsiu)와 마오쩌둥(Mao Tse-tung)이 이끄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장제스에게 협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탈린은 서방의 본격적인 공격에 살아남기에는 러시아의 경제가 너무 약하다고 걱정했다. 그리하여 1928년 그는 소련을 최대한 빨리 산업화시키기 위한 첫 5개년 계획을 단행했다. 사적 무역과 산업의 신경제체제를 완전히 제거하고 소비용 상품 대신에 공장들과 기계를 건설하기 위해 국가의 총력을 집중했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을 위한 식량증산을 위해 사적 농지를 몰수하여 그것을 정부의 집단농장화로 통합시킴으로써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을 제거했다. 그는 기술적으로 근대화된 나라로 후진적 러시아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당 중앙위원회에서 말했다. 강력하고 안전한 러시아에 몰두한 스탈린은 인간적 희생에 관해서 무관심했다. 그는 자신이 혁명가로서 수년 동안 고통의 세월을 견디어 낸 강철 같은 인간으로서 동료 러시아인들에게도 비슷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계획의 성공을 보여주는 통계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는 또한 자본주의적 무정부상태를 넘어서 계획경제의 우월성을 전 세계에 입증하고 싶었다. 1929년 시장경제가 불경기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계획경제의 선전은 스탈린에게 특별히 유용했다. 스탈린의 문제는 노동자들을 위한 일자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위한 노동자들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도로를 건설하고 거리를 청소하는 일에 여성들을 동원함으로써 그들을 부엌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켰다. 스탈린은 열정적 젊은 자원자들을 이용하여 서부 시베리아의 대규모 개발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집단농장화는 사실상 낮은 임금을 지불하는 농업 공장인 국가농장이 되고 말았다. 많은 자작 농민(kulaks)들이 그들의 농장을 집단화하는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관리들에게 도전했다. 그리하여 약 500만명의 농민들이 그들의 집과 마을에서 쫓겨나고 집단농장화 되었다. 모든 가족들이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그리고 북극지역의 산림지대에 있는 노예노동 캠프로 추방되었다. 농민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남겨진 무기들을 들고 소련 관리들에 대항하여 그들을 학살하는 게릴라전을 벌였다. 스탈린은 무자비하게 보복했다. 코카서스의 한 마을 전체가 붉은 군대의 포사격으로 말살되었다. 스탈린은 그런 학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러시아 정교회가 농민들에 대한 스탈린의 전쟁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성직자가 농민들의 저항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직자들이 체포되고 유배되었다. 교회들은 압류당해 정부청사로 변했다. 성탄절 행사가 금지되었고 모스크바의 교회 종소리가 금지되었다.

1932년에 이르자 식량 사정이 절망적이었다. 곡식들이 들판에서 수확되지 않았다. 씨앗은 뿌려졌지만 가꾸지 않았다. 기아사태가 러시아를 휩쓸었다. 스탈린은 모든 식당과 상점을 폐쇄하고 식량을 배급해야만 했다. 크레믈린에서 스탈린의 정적들이 다시 한번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한 분노한 비판자가 "굶어 죽지 않을 유일한 장소는 감옥이다"라고 말했다. 1932년의 수확량은 러시아의 역사상 최악이었다. 1932~1933년 겨울 동안에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 굶어 죽었다. 농민들에 대한 테러가 식량의 위기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당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스탈린에게 피로 물든 폭군의 이미지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러시아인들을 비인간적 잔혹성으로 몰았지만 그는 한 세대 동안에 수세대의 성취를 달성하게 했다. 같은 해에 스탈린이 제2차 5개년계획을 발표할 때 그는 조심스럽게 사탕발림을 했다. 그는 사회주의가 러시아에서 달성되었다고 유쾌하게 선언했다.

스탈린은 단지 5년 만에 후진적이고 경멸을 받던 러시아를 근대 산업사회로 변환시킴으로써 서방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제 그는 다음 5년을 통해 그의 무례하고 무식한 인민들을 세계에서 누구에게도 버금가는 교양 있는 시민들로 바꾸고 싶어 했다. '기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이제까지의 슬로건이 지금부터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새로운 슬로건으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그는 모든 러시아인들에게 위생관념과 에티켓, 그리고 세련된 행위의 교육과 함께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새로운 러시아인들에게 새로운 소련 사회의 고무적 상징을 제공하기 위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철을 건설했다. 몰수한 교회들은 하룻밤 사이에 '국립 반종교 박물관'에서 '종교적 문화사의 박물관들'로 변했다.

볼셰비크들이 처음에 정권을 장악했을 때 레닌은 각 당지도자들에게 경쟁자를 결코 죽이거나 암살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했다. 그 맹세는 1934년 12월 1일 세르게이 키로프(Sergei Kirov)가 살해될 때까지 16년 동안 지켜졌다. 그는 젊고 레닌그라드의 당의 수장이었고, 스탈린의 가까운 친구이며 그의 후계자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정치국이 키로프를 크레믈린에 합류하길 원했을 때 스탈린은 자기를 키로프로 대체하려는 음모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키로프는 모스크바에 도착하기 수일 전에 암살되었다. 스탈린은 직접 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레닌그라드로 달려갔다. 그는 공개적으로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면서 시신에 키스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즉시 117명의 '백색경비 테로리스트'라는 용의자들을 재판 없이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수천명의 레닌그라드 당원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지노비프와 카메네프도 감옥에서 끌려 나와 그 음모에 가담했다는 비난을 받고 비밀 재판을 받았다. 레닌그라드에서 돌아온 스탈린은 크레믈린을 비밀경찰 장교들로 둘러싸고 모든 정치국원들에게 경호원들을 붙였다.

1935년에 이르자 스탈린은 전 러시아를 경찰국가로 변질시켰다. 외국인과 말을 건네다가 붙잡힌 러시인은 누구나 반역죄로 자동적으로 체포되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옛 볼셰비크들이 비밀재판에 반역자로 회부되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총살당했다. 영향력 있는 혁명가들의 집단인 옛 볼셰비크 사회는 스탈린에 대하여 아시아식 전제정치, 즉 새로운 이반 더 테러블(Ivan the Terrible)이라고 불만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계속)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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