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뮤지컬 오지게재밌는가시나들_사진제공 라이브(주) (4) | 0 |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의 한 장면. /라이브(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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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만 넘어가도 '노잼 인생'이라 한탄들 하는 요즘, 여든 혹은 아흔 살이 다 되었지만 설렘으로 가득 찬 할머니들이 있다. 바로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김하진 극작·김혜성 작곡 및 음악감독·오경택 연출)의 등장인물들이다. 딸이기 때문에, 가난해서, 시집살이하고 애 키우느라 등의 이유로 이름 석 자 쓰는 법도 배우지 못했던 젊은 시절. 꿈같은 세월을 지나 이제야 팔복마을 문해학교에서 한글을 공부하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즐거운 모습이다.
원작은 김재환 영화감독의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과 수필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이다. 무대 위에서는 영란, 춘심, 인순, 분한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펼쳐진다.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지루하거나 늘어지지 않는다. 인물들이 짓는 시처럼 과하지 않으면서 군더더기가 없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사연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이야기의 흐름도 흥미진진하게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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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방송 피디인 석구(강정우)가 할머니들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을 담았다. 촬영은 문해학교 교사인 가을(하은주)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기도 하다. 지원금 삭감 때문에 수업을 운영하기 힘든 상황에 돌파구를 마련해보고자 함이었다. 그로 인해 재정적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할머니들이 석구의 제안으로 시를 쓰게 되면서 못다 이룬 꿈을 되찾고 삶을 더욱 만끽하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영란(김아영)은 장롱 서랍에서 한평생 자신에게 영감(靈感)을 준 푸쉬킨의 시를 꺼내온다. 검정 교복을 입은 첫사랑 오빠에게서 받은 것이다. 이제 그 오빠는 '화상'이라고 불리는 영감(令監)이 되었지만, 당시 소중한 기억만은 새로운 시가 되어 흐르고 있다. 춘심(박채원)은 한글을 몰라 곱게 접어 두기만 했던 팔복리 노래자랑 신청서를 꺼낸다. "어렸을 때 가수해쓰마 조아쓸글", 이 한 문장에 그녀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다.
인순(허순미)과 분한(강하나)의 사연에서는 좀 더 깊은 애환이 느껴진다. 손주가 동화책이라도 들고 올까 봐 겁냈던 인순. 이제는 이중 받침이 달린 '닭'이라는 글자도 자신 있게 읽어줄 수 있다. 45년 전 아들에게 답해주지 못했던 그 글자는 그녀의 시 제목이 되었다. 할머니들 중 막내인 분한은 이름 때문에 칠십 평생 분한 마음으로 살았다. 딸 낳고 시아버지한테 온갖 악담을 들었던 어머니의 서러움까지 짊어진 채. 그렇지만 글자 하나하나 써 내려가니 맺힌 마음도 봄 눈 녹듯 녹아버린다.
할머니들에게 시 창작은 못다 이룬 꿈을 보상받고, 보물 같은 삶을 재발견하는 치유의 과정이다. 그토록 원했던 교복을 입고 시 낭송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의 모습은 딱 16세 소녀들이다. 낙엽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는 그야말로 '가시나들'이다. 문해학교 수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더라도, 일상의 곳곳에 "천지 삐까리"로 "널려 있는" 시들을 발견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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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의 위트 있는 언어유희는 죽음을 대상으로도 펼쳐진다. 석구가 사진을 찍어주려 하자 "영정사진 찍어 주신다"며 좋아하고, 밤새 자는 듯 떠난 이웃집 할머니를 축하하며 부러워한다. 일찍 남편을 잃은 춘심에게는 하늘나라에 가면 젊은 남편이랑 살아서 좋겠다고도 말한다. 죽음 또한 삶의 일부분으로서 할머니들의 시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와 함께 음악과 무대, 연기가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5인조 밴드의 라이브 음악이 다채로운 장르를 활용하며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한다. 또 귀에 익은 멜로디나 스타일로 할머니들의 과거 사연을 재치 있게 뒷받침하면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그런가 하면 무대에 영사되는 그래픽에는 실화의 주인공인 칠곡 할머니들의 삽화와 글씨가 사용되어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할머니들의 호흡과 투박하면서도 정감 있는 말투와 몸짓을 놀랍게 잘 표현한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인다.
라이브(주)가 제작한 이 뮤지컬은 2022년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 시즌7'을 통해 개발됐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됐다. 이러한 개발 단계를 거치며 다양한 관객층으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완성도를 갖췄다. 세월에 깎여서 낮아진 구릉처럼, 은은하면서도 희로애락을 모두 느끼게 하는 특별함을 지닌 작품이다. 우리의 유쾌한 할머니들이 녹록지 않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관객들에게 꿀팁을 준다. 설렘을 장착하고 삶을 새롭게 바라보라고, 그러면 자신만의 시가 보일 것이라고.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오는 27일까지 공연한다.
/현수정 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lizhyun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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