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에 무관심했던 트럼프, "2기 행정부때도 비슷할듯"
아세안 다자체제보단 개별·양자 협상 선호
동남아 국가들, 다자·양자외교 균형 맞추며 실리 챙기는 것이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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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행정부(2017~2021년) 내내 트럼프 대통령은 동남아에 대한 무심하다 못해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1기 행정부 시절 트럼프 대통령은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아세안이 주도하는 다자협력기구인 아세안안보포럼(ARF), 아세안확대국방장관회의(ADMM+) 등에도 미온적이었다. 미국의 무관심에 국제사회의 관심과 아세안 중심성도 크게 약화됐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외교가와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아세안에 대한 무관심 기조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본다. 1기 행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아세안 전체와의 다자협력보다는 양자외교 위주의 접근을 택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더욱이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시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로 보호무역 기조는 한층 더 강력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대미(對美) 무역흑자를 내는 베트남·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각국 대한 관세 압박과 징벌적 관세 등으로 현실화 될 수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동남아 국가들은 아세안 차원의 집단 대응과 개별 국가 차원의 양자 외교를 동시에 펼칠 것으로 보인다. 아세안은 오는 5월 채택할 '아세안 공동체 비전 2045' 등을 통해 아세안 경제 통합과 역내 공급망 연계를 위한 협력 방안 등을 구체화해나갈 예정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양자협상 선호와 아세안에 대한 무관심이란 벽이 있는 만큼, 아세안 회원국들도 개별적인 대미협상에 나설 여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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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지정학적 가치가 높아진 베트남에겐 트럼프 2.0 시대는 기회와 위기가 공존한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안정적인 투자처로 주목받으며 미국 기업과의 협력이 확대될 수 있지만, 중국과 멕시코에 이어 대미 무역흑자 3위를 기록했다는 점이 통상 압박의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 베트남도 대미 무역 보복을 최소화하며 안보와 경제 협력을 유지할 수 있는 균형 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안보동맹 리스크' 필리핀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남중국해 이슈 등을 계기로 친미·반중노선을 강화해 온 필리핀도 미국과의 관계 조정은 불가피하다. 동맹국에 대한 책임 분담을 요구하고 있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필리핀은 군비 부담 확대에 직면할 수 있다. 중국이 급격히 대응 수위를 높인다는 변수가 작용하지 않는 이상, 필리핀도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이어가기 위해선 미국산 무기 구매 등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미·중 사이 균형외교가 관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의 '대안'을 지향하는 브릭스(BRICS) 가입과 아세안 역내 협력 강화 등으로 대외적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모두 친중 기조를 함께 유지하는 헤징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만큼 트럼프 2기 행정부와 갈등이 생길 여지도 있다. 두 국가 모두 중국 자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면서도 미국으로부터 일방적인 압박을 받지 않도록, 지정학적 균형을 지향해 나가야 한다는 외교적 과제를 안고 있다.
태국·캄보디아 '적정거리 유지'
태국은 미국과 조약 동맹 관계임에도 인도태평양전략에선 주요 파트너로 부상하지 못했다. 태국이 국가 경제의 핵심인 관광업 분야에서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듯이 캄보디아 역시 정치·경제적 이유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들 국가는 미국과의 안보협력보다는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실용적 대미관계를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캄보디아는 트럼프 1기 당시 대미 수출이 급증했었던 '좋은 기억'이 있으나 동시에 부자(父子) 통치를 이어가고 있는 정치 상황으로 인해 인권·민주주의 문제란 리스크를 안고 있다.
공고한 협력 싱가포르, 우려의 미얀마
미국의 인태전략에서 가장 긴밀한 안보협력을 추진해 온 싱가포르는 앞으로도 미국과의 협력 확대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싱가포르는 대미 3대 아시아 투자국이자 대미무역 적자를 기록하고 있어 트럼프발 관세 충격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할 국가로 꼽힌다. 동남아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의 주요 관문으로도 꼽히는 싱가포르는 앞으로도 인공지능(AI)·반도체 분야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미국과의 양자협력 기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2021년 2월 군부 쿠데타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등에 업고 있는 미얀마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이 큰 변수가 될 수 있다. 미얀마 군부는 올해 총선을 실시한다는 계획이지만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 지명자가 과거 핵심 광물인 희토류의 중국 독점 타파를 위한 법안을 발의하고 미얀마 군부와 국영 기업 제재 등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적극적 개입'이 이뤄질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트럼프의 귀환으로 동남아는 또 한 번 복잡한 도전에 직면했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트럼프 2.0 시대, 동남아 국가들이 흔들리지 않고 성장·안보·외교적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자·양자 외교의 균형을 정교하게 맞추면서 "누구와도 완전히 틀어지지 않는" 실리외교를 펼쳐야 한다. '다양성 속의 통일' 아세안의 선택과 대응이 주목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