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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의 역사에서 문명(文明, civilization)의 발생은 기후 변화와 무관할 수 없다. 빙하기 혹한 속에선 지구 위의 그 누구도 고도의 문명을 건설할 수 없었다는 가설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1만5000년 전부터 시작된 전 지구적 온난화가 결국 문명 발생의 가장 중요한 외생 변수가 되었다는 해석이다. 쉽게 말해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지구인들은 혹한의 굴레에서 풀려나서 더욱 활달하게 움직이고, 더욱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더 큰 사회를 형성하고, 더 복잡한 관계망을 이루게 되었다는 얘기다. 자연환경의 변화를 무시하고선 지구인의 세계사를 논할 수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지축이 슬쩍 틀리면서 태양의 조도가 바뀌고 탄소량이 증가하면서 혹독하던 빙하기는 물러났다. 1만5000년 전부턴 극지방에 두껍게 쌓여 있던 빙상(氷床, ice sheet)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올라갔다. 눈 녹은 바닷물은 지구 전역의 낮은 땅을 메우면서 베링 해협과 발트해가 생겨났고, 얼음에 덮여 있던 스칸디나비아의 땅바닥이 드러났다. 밀려드는 바닷물은 동남아시아를 휩쓸면서 대륙과 붙어 있던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는 고립된 열도(列島)를 이뤘다. 북유럽에는 넓은 삼림 지대가 나타났고, 매머드와 같은 빙하기의 동물들은 자취를 감췄다. 북아프리카 사하라 지대에 강수량이 많아지면서 낮은 풀숲이 만들어졌고, 그 결과 수천 년 넘게 적도 지방에 고립돼 있던 아프리카인들은 여타 지역 사람들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그렇게 기후 변화는 지구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고고학의 일반론에 따르면, 지구인의 역사에서 농경이 발생한 후 7000년 전쯤 지나서야 문명이 발생했다. 역사학자들은 문명의 조건으로 인구 증가, 도시 형성, 계급 분화, 국가 발생, 문자의 사용을 꼽는다. 그런 기준에 따르면 문명은 5000년 전쯤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태동했으며, 이후 1000년에 걸쳐서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에서도 나타났다. 이후 문명은 이후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지역에도 꽃피었다. 5000년 전부터 시작된 문명의 역사에 대해선 실로 많은 연구가 축적돼 있다. 고고학적 유적과 문자 기록이 함께 전하기 때문이다.
100년 넘게 지구인의 역사의식을 지배해 온 이러한 일반론은 최근 20~30년 땅속에 묻혀 있던 선사 시대의 거석(巨石, megalithic) 유적지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흔들리고 있다. 지난 몇 회에 걸쳐 살펴봤듯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지바의 괴베클리 테페와 인도네시아 구눙 파당은 지난 수천 년 지구인들을 지배해 온 문명의 개념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다. 빙하기의 선사 시대에 고도의 문명이 이미 존재했을 가능성을 전면 배제할 수는 없다. 수렵채집인들이 수십 톤의 거석을 채취하여 그토록 거대한 구조물을 건설했다고 생각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무너지고,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
지난 5000년간 진행된 문명사 이전에 또 어떤 고도 문명이 있었다는 가설이 터무니없어 보이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구인의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서 기원전 3000년을 역사 서술의 출발점으로 삼은 선대 역사가들의 노고를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적어도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역사적 증거물을 채집하여 충실히 귀납적으로 관찰되는 인류사의 변화를 추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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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지구인의 문명사는 농촌 마을의 출현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다룬다. 아나톨리아 지방 남부의 차탈회위크(Catalhuyuk)에서 수천 명이 모여 사는 농촌 마을이 생겨난 후 4000~5000년쯤 지나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복잡한 사회(complex society)가 등장했다. 복잡한 사회의 제1 특징은 정부의 출현이다. 많게는 7000명 이상 살았다고 추정되는 차탈회위크 유적지에선 아직까지 대규모 정부 건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엇비슷한 민가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지만, 그 마을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공동의 정부 조직은 없었던 듯하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유적지를 보면 다수 인민 위로 군림하는 정치권력의 실체가 확연히 관찰된다. '국가 없는 사회(stateless society)'에서 '국가화된 사회(stated society)'로의 극적인 전환이 보인다. 국가가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의 출현이 과연 약육강식의 투쟁에서 승리한 힘센 자의 지배욕 때문이었을까? 물론 권력자의 지배욕을 빼고서 정치를 설명할 순 없겠지만, 다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어느 권력자도 권력을 유지할 수가 없다. 1651년 출판된 정치이론서 '리바이어던'에서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썼듯이 아무리 약한 자도 가장 강한 자를 죽일 수 있을 만큼의 힘은 갖고 있는 까닭이다.
'국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오던 대다수가 '국가화된 사회'에서 살아가게 된 계기는 정부가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공동의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 공동의 문제는 농경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넓은 땅을 개간하고 물길을 끌어오고 대량의 곡물을 수확하고 탈곡하는 모든 과정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협업을 요구한다.
물론 사회적 협업 그 자체가 정부의 출현을 보장하진 않는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차탈회위크의 주택 배치를 보면, 그 마을 사람들이 긴밀하게 얽힌 경제적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천 년의 세월을 살아갔음에도 그 마을 사람들은 정부를 세우진 않았던 듯하다. 전문적 행정기관이나 대규모 종교시설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농경의 발달, 정부 출현으로 이어져
결국 정부의 출현은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서 토지 개관과 수로 공사 등 대규모 토목 사업의 필요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사냥과 달리 농사는 치밀한 계획에 따라 노동력을 합리적으로 투입하면 소출량이 몇 배로 늘어날 수 있다. 한 사회의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활용하면 1인당 생산량이 증가한다. 어느 사회나 공동의 문제가 생겨나면 머리를 맞대고 최선책을 찾아가는 중지(衆智)의 합리성이 발휘된다. 농업 사회에서 모든 이의 노동력을 결집하여 효율적으로 조직하기 위해선 정확한 지식에 기반하여 선명한 비전을 제시하는 지혜로운 리더가 등장해야만 한다. 지혜로운 리더가 사회적 노동력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 분업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점에서 고고학자들은 국가의 발생이 집약적 농경(intensive agriculture)의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농업의 발달은 인구 증가를 초래했으며, 인구 증가는 식량 부족을 야기했다. 불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선 식량 생산량을 늘려야만 했다. 소출량을 늘리기 위해선 농지를 개간하고 수로를 연결하는 공동의 토목 사업이 이뤄져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지혜로운 리더들은 대규모 인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배치하는 본격적인 정치의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나 멕시코 아즈텍의 영도자들은 수백 명의 관료들을 고용해서 토지를 조사하고 농지를 확충하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농경은 자연적 진화에 역행하는 비자연적 선택의 과정이다. 정부는 자유로운 인간을 규제하는 비자연적 조정의 과정이다. 문명은 그렇게 자연의 법칙을 역으로 이용하는 인위(人爲)의 결과물이다. <계속>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