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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여 년 전 자유주의 공화주의가 미국과 유럽에서 구체제를 타도했을 때 그들을 계몽주의 혹은 이성의 시대를 안내하는 정치철학자들이 있었다. 스피노자와 로크에서 칸트와 심지어 헤겔에 이르는 근대성의 철학자들은 단지 인간의 권리에 관해서 말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권(natural rights)을 강조하면서 자연의 법칙들과 자연의 신을 내세우면서 '자연 상태', '사회계약' 그리고 '단정적인 명령법' 같은 근본적인 개념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오늘날 공산 전체주의의 타도 이후에 이런 근대성의 한때 압도적인 철학적 기둥들이 널리 불신받고 있다. 우리의 철학적 시류는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며, 환멸적이다. 참으로 오늘날 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추세는 너무 미약하고 단편적이어서 시류만큼 강력한 어떤 것도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정의된 의심할 여지 없는 토대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그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결정적인 의미에서 근대성에 의해서 정의된다. 이 포스트모던은 근대 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도망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신뢰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근대성에 묶여 있는 상태이다.
근대성의 핵심에는 과학적 이성에 대한 믿음과 신념이 있다. 근대과학을 위한 지적 지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 긴 투쟁은 동시에 모든 인간 사이에서 진정으로 공동의 유대를 위한 유일하게 공고한 토대로서 과학적 이성에 기초한 보편적 인류의 새로운 문화를 위한 투쟁이었다. 과학을 위한 투쟁은 동시에 보편적이고 대중적 계몽의 문화를 위한 투쟁이었다. 새로운 문화는 수 세기에 걸친 배타주의적 미신들로부터 해방운동에 뿌리를 내렸다. 그것은 비합리적이고, 과학 이전의 부족적이고, 민족적이고, 종파주의적 전통들에 뿌리를 둔 부당한 경제적 및 정치적 헤게모니들에 대항하는 혁명으로부터 출현할 것으로 예견되었다. 새 문화는 새로운 내용, 새로운 목적, 그리고 좋은 삶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가져올 것으로 예견되었다.
그러나 공적이고 또 사적인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며, 일반적으로 수용할 만한 토대를 제공할 계몽주의 정치 철학자들에 의한 시도들은 부적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편적 인간애와 평등, 동의에 의한 정부, 자유 시장, 관용과 사적 영역의 신성시 같은 지도적인 도덕적이고 시민적 개념들은 자유주의 공적 정신의 방어벽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런 정신을 위한 원래의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토대들이 부식되었다. 그리하여 공적 기풍이 연약하고 불안정하게 되었다. 오늘날 교육받은 시민들 가운데 자연권이나 인간의 권리를 감히 인정하려 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인간의 권리에 관한 계몽주의 개념의 핵심인 재산권은 오늘날 헌정주의자들에게 크게 회의적이다. 무엇보다도 이성 그 자체가 그리고 합리주의가 의미하는 보편주의가 점점 더 불신받고 있다. 근대적 합리주의가 루소(Rousseau)에서 시작하여 니체(Nietzsche)와 하이데거(Heidegger)에서 절정을 이루면서 계승되는 철학적 비판자들에 의해 두들겨 맞았다. 그들은 합리주의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하나의 납득할 만하게 심오하고, 다양하며, 창조적이고 또 역사적인 설명을 제공할 수 없다는 강력한 주장들을 내놓았다. 오늘날 서양 세계는 환상적으로 강력한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자원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도덕적 목적과 토대를 깊이 불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가 반이성주의 혹은 반과학주의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점차로 새롭고, 고도로 문제가 많으며, 그리고 회의적인 문화적 추세에 의해서 점차로 침투당하고 또 형성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가 되는 니체와 하이데거에 의하면 17~18세기에 서양문명을 점차 지배하게 된 과학과 합리주의에 대한 의미의 분명한 견해를 우리에게 처음으로 허용한 시대를 19세기 말에 맞이하였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우리의 합리주의적이고 과학적으로 성숙한 문화가 어떤 근본적인 카테고리(범주)들, 분석의 양식, 그리고 평가의 기준을 통해 그 자체와 모든 인간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카테고리들이란 항구적, 보편적, 객관적인 것과 평화와 필연, 그래서 예측 가능성 등이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경험들에 대한 진실하고 심오한 명상으로 알게 된 역사의 경험은 인간의 존재에서 가장 가치 있고, 또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그런 합리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카테고리를 통해서 적절하게 간파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진실, 혹은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진실과 인간존재의 훼손을 가져온다. 인간의 삶에서 진정으로 취약한 것은 미덕들, 신들, 아름다운 것, 공동의 의무, 탁월한 개인들 그리고 아주 다양하게 표현되는 삶의 방식 등, 즉 존재(Being)로 구성된다. 이 존재는 다양하고 영원히 창조적이며 전혀 역사의 예측할 수 없는 투쟁의 드라마를 통해 드러낸다. 존재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와 그리고 인류에 달려있다. 인류가 멸종하게 되면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존재가 오직 시간이나 역사 속에서 자체를 노출한다고 말하는 것은 질서란 문화적 '수평선' 내에서 발견되고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야망은 예술작품들, 영웅들, 그리고 신성한 숭배의 대상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수평선들은 본질적으로 갈등 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또 서로에 의해서 변화된다. 참으로 의무의 가장 압도적인 원천과 야망의 대상이 정신의 투쟁과 경쟁하는 외국인들과 문화와 시대 사이의 전쟁 들에서 가장 생생하게 정의된다. 그들은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 투쟁의 실재 과정에서 전쟁을 벌이는 민족들과 인민들은 자기들의 다름에 대한 주장에서 보다 더 많은 자의식을 갖게 된다. 인간적인 것을 이해하려는 모든 심오한 시도는 항상 원근화법(perspectival)이다. 왜냐하면 특수한 문화에 젖어 있는 인간들은 반대되는 해석상의 조망을 가진 다른 경쟁적 문화와 투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존재에 사로잡히면 심판할 수밖에 없다. 즉 그것은 열정적인 도덕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니체가 새로운 가치들이라고 말하는 것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합리적 분석을 넘어 기대하지 못한 야망을 갖는 경험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주장하듯이, 역사적 사건에 반응하여 그런 결정을 한다는 것은 심각한 도전과 말썽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자신과 자기 민족과 자신의 문화를 정의한다는 것은 타인들에 대해 그리고 타 민족과 타 문화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우월한 지위에 놓는 것이다. 진지하고 헌신적인 존재의 심장부에는 평화나 조화나 평준화가 아니라 최고의 충성과 지배의 특권과 책임에 대한 적대적 주장들 사이에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과학은 '어떻게'에 관해서 성찰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무엇'과, 무엇보다도, '왜'에 대해 표현할 능력이 모호하다. 만일 니체가 옳다면 우리는 미래를 위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거나 아니면 하이데거가 옳다면 우리는 미래를 위해 새로운 신들이 차오르길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조건적 합리주의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합리주의적 사회는 정신이나 영혼을 무시하고 물질적 복지를 강조하는 성향이 있다. 거의 동등하게 모든 사람에 의해서 추구되는 것은 허영심의 만족, 동료들이나 이웃들의 승인과 찬양에 대한 시시한 의존이다. 합리적이고 평등주의적 대중 민주주의에 정당성이 일단 부여되면 이런 의존은 암처럼 자라서 정신적으로 난쟁이이고 도덕적으로 겁쟁이이며 분자화된 개인에 대해 순응적 여론과 선전은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민주정치는 막스 베버(Max Weber)가 '절차적 합리성(procedural rationality)'이라고 부른 것으로 인해 부드럽고 감각을 마비시키는 관료제도의 연성 폭정(soft tyranny)으로 나갈 것이다. 하이데거는 여전히 막연한 포스트-합리주의적 미래를 위해 합리주의에 대한 철학적으로 세련된 반란을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이데거 사상의 으스스한 성격을 경계해야 한다. 나치즘에 대한 그의 포용은 그가 말하고 썼던 모든 것에 대해 소름 끼치는 그림자를 남겼기 때문이다.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