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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상이군인들의 축제 ‘인빅터스 게임’ 사상 대한민국에 첫 금메달을 안긴 양궁 리커브 개인전 금메달리스트 김강훈 선수의 말이다.
지난 2006년 8월 육군 22사단에서 복무하다 불의의 총기오발 사고로 부상당해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 김강훈 선수는 금메달을 딴 소감을 묻자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자신감만 있다면 뭐든 못해낼 게 업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메달리스트 김강훈 선수 일문일답
-어떻게 상이군인이 됐나?
=2006년 8월 쯤이다. 강원도 고성 육군 22사단에 상병으로 복무중이었는데 총기 오발 사고로 관통상을 입었고 척추를 다치게 됐다.
-양궁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처음에는 운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재활만 생각하고 있었다. 재활한다고 한 2년 정도를 병원만 돌아다녔다. 잘 한다는 병원을 돌아다니다가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남 통영의 집으로 내려가게 됐다. 적응을 못해서 집에서 생활하는 게 힘들었다. 일반 주택이라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기에 불편한 좀 있었다. 그래서 거의 1년은 밖에도 안나가고 집에만 처박혀 있었다. 그러다 예전에 병원에서 경험했던 휠체어 럭비가 생각났다. 경남 장애인 체육회에 전화를 해서 휠체어 럭비를 할 수 있는지 문의했는데 휠체어 럭비팀이 있다고 해서 시작하게 됐다. 그렇게 10년쯤 휠체어 럭비를 해오다 힘든 부분도 있었고 어깨도 아파서 다른 운동을 찾다가 양궁을 추천 받았다. 한번 체험을 했는데 또 다른 매력을 느꼈다. 럭비와는 전혀 다른 정적인 운동인데 그만의 매력이 있어서 시작을 하게 됐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 5년째 양궁을 하고 있다.
-장애인 국가대표라고 들었다.
=뭐 실력은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에 워낙 잘하는 선수들이 많아서 운이 좋게 국가대표가 된 것 같다. 올해 처음 국가대표에 선발돼 세계선수권 대회에 나가기로 했는데 대회 1주일 전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서 못나가게 됐다. 그래서 이번 대회가 더욱 의미가 있다. 사실 이번 대회도 출전 못할 뻔 했다. 여기 오기 1주일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혼자 계시는 어머니 때문에 출전을 포기 할 생각도 했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양궁선수라면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실력 아닌가?
=오기 전부터 여러분들이 기대를 해주시는 바람에 심적 압박이 좀 있었다. 저 역시 메달에 대한 기대를 하고 왔지만 막상 시합을 하다 보니 다른나라 선수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다들 잘 쏘더라. 대한민국 양궁에 대한 자존심이 금메달의 원동력이 된 것 같다.
-4강전에서 슛 오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예선은 맘 편히 치렀는데 토너먼트에 들어가면서 긴장감이 들었다. 한 칸, 한 칸 올라갈 때마다 긴장감이 너무 올라왔고 4강전에서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폴란드 선수 였는데 너무 잘 했다. 진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내가 쏘면 이 선수가 따라오고, 내가 이기면 또 따라오는 상황이었다. 결국 5대 5 동점에서 마지막 한 발로 승부를 내야 하는 상황까지 갔다. 상대 선수가 먼저 8점을 쐈다. 그리고 내가 쏘는 데 팔이 뒤로 안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딱 쐈는데 ‘이거는 빠졌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8점이나 7점일 줄 알았는데 9점이 되면서 이길 수 있었다.
-4강전에 비하면 결승전은 아주 쉽게 이겼다.
=모든 경기가 쉽지는 않다. 자신감이 중요한데 어제 4강전에서 이기면서 부담감을 많이 덜었다. 당초 목표가 결승 진출이었고 목표를 이뤘다는 생각에 긴장감은 좀 덜했지만 그래도 결승은 결승이었다. 살살 긴장도 되고 했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마음으로 한발 한발 쐈다.
-좋은 결과를 얻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달라.
=몸을 다쳤다고 해도 처음에 너무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장애가 있더라도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내 경험으로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다. 또 주어진 다른 일도 얼마든지 해 낼 수 있다. 자신감이 최고인 것 같다. 자신감을 가지고,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