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지역에 위치한 전방후원분 |
하지만 방송사의 보도에 나온 고분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 결과 전방후원분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났고 다시 한 번 한일 사학계에 논쟁거리로 대두됐다.
전방후원분이란 시신을 안치하는 봉분은 둥글게 만들고 그 앞 제단은 사각형으로 만든 독특한 고분 양식으로, 일본에서는 3세기 무렵에 등장해 7세기 전반에 소멸했다. 일본 전역에서 7000기 이상 발견됐으며 한반도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만 10여 기가 확인됐다.
앞부분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4각형 공간이 있고 뒷부분에 무덤 시설이 있는 둥그런 형태의 전방후원분은 일본 고분시대의 대표적 무덤양식이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남지역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5세기부터 6세기까지 반짝 등장했다 사라졌다. 그 모양을 살펴보면 앞 쪽은 사각형 마당 모양의 넓은 제단을 만들고 봉분은 둥그렇게 조성한 독특한 묘제 역시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대 일본의 고유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자 일본 언론과 학계는 “일본 문화가 한반도에 유입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내 학계에서는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전방후원분이 백제와 고대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의 증거로 보고 있다.
특히 혼란스런 당시 백제 상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성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도를 공주로 옮기는 등 대격변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지배구조가 바뀌고 약해졌을 때 왜인(倭人)이나, 왜에서 넘어온 사람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다.
1960년대 초반 이후 40년을 발굴현장에서 보내고,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지난 2002년 퇴임한 조유전 박사는 영산강 일대의 무덤을 “일본에서 귀환한 ‘마한인’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반도에서 주구묘를 썼던 전남지방의 마한세력 중 일부가 왜로 이주했다. 그런데 왜로 넘어간 마한 이주민의 후예들이 다시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걸쳐 원래의 고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돌아온다. 이 무덤은 그때 형성된 것이 아닐까”라는 해석이다.
동국대 역사교육과 윤선태 교수는 “한반도에서의 전방후원분 논쟁은 ‘변경론’으로 풀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영산강 유역에 산재하는 10여기의 전방후원분의 ‘주인’과 관련해 △왜인설 △왜계 백제관료설 △해당지역 수장설 등을 제기했다. 특히 왜와 빈번하게 왕래한 이 지역 수장층이 한성백제 몰락 후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역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왜와 자신들이 통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왜의 묘제를 축조했을 것으로 설명했다.
윤 교수는 “백제도, 일본열도의 세력도, 해당지역 수장도 모두 공유할 수 있었던 공간이 분명 한반도에 있었다”며 “이 공간은 일종의 ‘변경’으로서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가 만나는 교류의 장이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