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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임나일본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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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성 기자

승인 : 2008. 10. 01. 17:52

한일 교류사로 인식의 지평을 넓힐 때
19세기말, 1400여년의 침묵을 깨고 비석 하나가 발견됐다. 바로 광개토대왕비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비문과 일본서기를 근거로 4세기부터 6세기까지 200년간 고대 일본이 고대 한국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한일 고대사를 둘러싼 논쟁의 시작이었다. 광개토대왕비 재발견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한일 역사학계 최대의 쟁점인 임나일본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4월 전남 영암군에서 열린 '2008 왕인문화축제'.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학자인 왕인은 고대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일본으로 전달했다는 상징 중 하나이다.
지난 4월 전남 영암군 군서면에서는 '2008 왕인문화축제'가 4일 동안 열렸다. 왕인박사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 다채로운 행사에 일본인 등 국내외 관광객 95만명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영암군은 "2008 대한민국 문화관광축제인 영암왕인문화축제가 왕인박사의 소통과 상생의 글로벌 정신 속에 큰 결실을 거두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고 자평했다.

왕인박사는 5~6세기 고대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의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각종 기록과 이야기를 통해 왕인이 경서(經書)에 통달했으며 왕과 신하들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다고 전하고 있다. 또 오사카부에 속한 히라카타(枚方)시에 왕인의 무덤이 있고, 오사카·큐슈지역에 각각 왕인을 기리는 신사가 세워져 일본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왕인박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인물이다. 고대 한반도의 우수한 문화를 일본으로 전달했다는 상징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고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한반도의 국가들이 일본에 한문과 불교를 비롯해 금관, 철기 등 선진문물을 전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을 은근히 얕잡아 보는 경향도 이 때문일 수 있다.

현재 일본이 경제대국이지만 과거에는 우리의 문물을 전달받아 나라의 기틀을 갖출 수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아가 백제의 유민들이 바다를 건너가 일본을 만들었다는 주장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한일 고대사를 인식함에 있어 한국의 우월성이 강조된 탓이다.
◇일본, 교류의 흔적을 침략의 정당성으로
일본은 한일 고대사를 우리와 정반대로 해석하고 주장한다. 즉, 일본제국주의가 고대 한반도와의 교류의 흔적을 한반도 침략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이것이 현재 일본의 역사인식에 강한 영향으로 남아 있어 역사왜곡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왕인박사의 경우만 해도 신사를 세워 기억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시기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추진하면서 이를 홍보하기 위한 의도 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얼마 전 일본의 천황 아키히토가 자신에게 백제 도래인의 피가 섞여있다고 언급한 것도 과거 일제가 주장한 내선일체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고대에 왜가 임나를 점령해 그곳에 군정기관인 일본부를 두고 그곳을 근거지로 해 한반도 남부지방을 경영했다는 학설인 '임나일본부설'은 대표적인 한일고대사 왜곡의 사례이다.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임나일본부설은 현재 출선기관설, 기마민족설, 가야의 왜설, 외교사절설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하지만 이들 학설에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방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강조돼 있다.

문제는 이것이 3세기에 일본의 신공황후가 남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했다는 전설과 맞물려 현재 일본인들의 인식 속에 '고토회복'이라는 일제시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은연중에 배어들게 한다는 점이다.

◇6세기 일본은 없었다
임나일본부설은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에 해당하는 '일본서기'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일본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80척의 배를 거느린 일본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했다는 전설이 언급돼 있다.

또 4∼6세기에 야마토 왕국이 한반도의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 6가라(가야)를 정복해 임나일본부라는 일종의 총독부를 두고 직할 식민지로 약 200년간 통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일제는 19세기 말 한국 침략시 임나일본부설을 침략의 구실로 사용했다.
신용하 교수(이화학술원)는 일제 어용사가들의 ‘임나일본부설’도 그 유일한 근거인 ‘일본서기’ 흠명기를 읽어 보면 날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선 일본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대로 일본 열도에서 ‘일본’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서 사용한 것은 7세기 말∼8세기 초다. 그런데 이에 앞서 4∼6세기에 어떻게 ‘일본부’라는 명칭의 기관이 한반도에 설치될 수 있었겠느냐는 점이다. 명칭부터 ‘일본서기’ 편찬자가 날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또 일본 야마토 왕국이 임나일본부라는 총독부를 두고 200년간이나 통치한 이 엄청난 사건을 한국과 중국의 사서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은 채 오직 일본서기에만 나온다는 것은 임나일본부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기에 한국 역사에서 실재했던 가라국은 임나를 포함해서 6가라, 임나를 빼면 5가라 체계였다. 그런데 일본서기 흠명기의 임나일본부가 통치했다는 임나는 10개 가라체계로 가라, 안라, 사이기, 다라, 졸마, 고차, 자타, 산반하, 걸찬, 염례 등 10가라가 공존한 것으로 돼 있다는 점에서 사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 될 수 밖에 없다.

◇ 왜의 활동은 인정해야
박대재 교수(고려대, 한국고대사)는 "임나일본부설만 이야기하다보면 본류가 호도될 수 있다"고 말한다. 4~6세기까지 가야가 일본에 철기를 전해 준 것이라든가, 이후 6세기 백제가 일본에 문화를 전달해 준 것과 같은 교류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최근 임나일본부설을 둘러싼 논의는 안라국에 국한된 왜관의 주재관으로 보는 견해가 통설"이라면서 "다만 가야의 멸망 직전, 즉 6세기 전반에 왜가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정치적 상황에서 주도권은 없었지만 분명히 개입은 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교류사의 입장에서 주목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의 역사교과서에도 신라, 백제, 가야, 일본 4국의 관계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식민시대를 경험한 후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관계성, 그 빌미를 잘라버리기 위해 우리의 역사교과서에는 고대 한반도에서의 왜의 활동에 함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대 한일교류의 사실을 언급 할 시점이 왔다는 것이 박 교수의 생각이다.

여전히 고대사 연구에서는 한일 간의 자존심 싸움이 진행 중이다. 일본의 연구자들은 임나일본부 및 왜의 활동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 연구자들은 이를 식민주의 사관이라고 해 한반도에서의 왜 활동을 도외시하고 그 대신 삼국이 일본 열도에 문물을 전수해 준 점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한반도 남해안 지역에서는 왜국과의 교류 흔적이 담긴 유물이 많이 나온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일본에게) 주기만 할 수는 없다. 온 것도 많을 것이다. 철을 수출하면서 군사력을 원조 받는다든가…물품이든 노예든 왔을 것이다. 당시의 한일 교류관계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일방적인 역사만 가르치다 보면 문제가 된다."

박 교수의 이 같은 언급은 우리가 식민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사실과 이성을 바탕에 둔 역사인식을 확고히 해야 임나일본부설로 대변되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보다 냉철하게 지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을 주고 있다.
김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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