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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집트 문명을 일으킨 최초의 통일 군주 나르메르의 행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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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2. 23. 17:57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29회>
나르메르 팔레트(기원전 3200~3150년경) 앞면과 뒷면
나르메르 팔레트(기원전 3200~3150년경) 앞면과 뒷면.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 소재.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외계인 미도가 물었다.

"지구인의 역사에서 이집트 문명의 출현은 실로 독보적인 사건으로 보여요. 기자(Giza)의 대(大)피라미드, 스핑크스, 카르나크 신전, 람세스 4세의 분묘 등 고대 이집트 문명이 남긴 위대한 유적을 살피면서 고대 이집트인들의 창의적인 상상력과 심오한 정신세계에 빠져듭니다. 그토록 거대한 구조물들을 건설한 사람들은 대체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대체 무엇을 바라서 그토록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을까요?"

우주 어디에 있는 고등 생명체라도 미도처럼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유물을 보고 경이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으리라. 고대 이집트 문명의 형성, 발전, 소멸 전 과정은 지구인뿐만 아니라 외계인의 눈에도 신비롭고 경이롭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집트 문명은 그 자체가 통째로 범우주적 신비이고 역사의 수수께끼라는 말이다.

피라미드나 스핑크스의 건축 시기와 관련해선 지금도 사라진 선사(先史) 문명의 흔적이란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다.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실은 청정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였다는 도발적인 주장도 널리 퍼져 있다. 물론 고고학계의 주류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과장된 엉터리 학설이라 비판한다. 그렇다고 학자들이 피라미드의 진실을 완벽하게 규명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신비에 관해서 지구인들은 아직도 무지의 베일에 휩싸여 있다.

나르메르의 위업이 기록된 최고(最古) 문서
고대 이집트 최초의 통일 군주 나르메르의 위업이 기록된 최고(最古) 문서.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
◇ 이집트 문명은 과연 "나일강의 선물"인가?

기원전 450년 이집트를 걸어서 답사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 기원전 484~425년)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일강은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서 장장 6650㎞를 굽이치며 흘러간다.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의 지중해로 흘러가는 나일강은 남부의 누비아와 북부의 이집트를 잇는 젖줄 같은 강물이다. 헤로도토스의 지적대로 나일강이 없었다면 이집트 문명은 생겨날 수 없었다.

나일강은 해마다 정기적으로 범람하여 양분이 풍부한 검은 표토(表土, topsoil)를 강둑 양쪽에 쏟아놓았다. 덕분에 강변으로는 넓게 펼쳐진 천연 농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따로 비료를 주지 않아도 다른 어떤 곳보다 더 많은 곡물을 산출할 수 있는 그야말로 천혜의 옥토였다. 고운 흙이 가득히 쌓인 그 넓은 땅 위에 곡물의 씨앗을 뿌리면 수백 배 많은 곡식을 어김없이 산출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나일강둑 양변에 몰려들어 마을을 이루고서 수천 년을 풍족하게 살아갔다.

국가 출현 훨씬 전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미 자생적인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고 강변의 개활지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장구한 세월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얘기다. 고대 이집트 국가는 이미 존재하는 강변 마을들을 차례로 지방 행정단위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문제는 나일강만으로는 이집트 문명의 창조력과 고유성을 제대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융성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집트의 위대한 임금들, 곧 파라오(pharaoh)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문명의 형성 과정에서 파라오는 대체 어떤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까?

◇ 파라오의 위대한 업적(業績)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헤로도토스의 한마디는 문명 발생의 자연적 조건에 대한 지리적 설명일 뿐, 이집트 문명의 고유 특성과 위대한 업적에 대해선 사실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나일강은 문명 발생의 필요조건을 제공하긴 했지만, 고대 이집트 문명이 그렇게 독특한 발전경로를 거쳐 간 이유엔 다양한 지도자들의 개성과 의지가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나일강이 베푸는 자연적 혜택에 자족했다면 피라미드를 건축하는 높은 수준의 고대 문명을 형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강을 이용해서 상상을 절하는 경제적 풍요와 부의 집적을 이뤄냈다. 바로 그 점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집트의 절대군주 파라오의 적극적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가들이 특히 주목하는 인물들로는 이집트 제1왕조의 제1대 파라오 나르메르(Narmer),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이집트 제4왕조의 제1대 파라오 스네프루(Sneferu, 재위 기원전 2613~2589년), 최초의 여성 군주 하트셉수트(Hatshepsut, 재위, 기원전 1479~1458년), 태양신 아톤의 일신교 체제를 확립한 제18왕조의 파라오 아크나톤(Akhenaten, 재위 기원전 1352~1335년), 이집트 신왕국 19왕조의 제3대 파라오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람세스(Ramses, 재위 기원전 1279~1213년)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집트 북부 나일강 하류에서 일어나서 남부의 나일강 상류 지역을 정치적으로 통일한 나르메르의 업적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인류사 현전 최고(最古) 문서는 기원전 3200년 혹은 3150년경 최초로 이집트를 통일한 나르메르의 영웅적 위업이 기록된 나르메르 팔레트(Narmer Palette)다. 1897~1898년 고대 이집트 남부의 종교적 중심지 네켄(Nekhen)에서 영국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이 팔레트는 5000년간 땅속에서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실트암(siltstone)을 잘 갈아서 만든 기다란 반쪽 타원형의 팔레트로 크기는 세로 63㎝에 가로 42㎝ 정도이다. 양면에 부조된 여러 상징적인 그림문자들은 고대 이집트 최초 통일 왕조가 세워진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앞면 중앙에는 긴 모자를 쓴 큰 사내가 곤봉을 잡은 오른팔을 쭉 위로 뻗고 정을 잡은 왼손은 주저앉은 사내의 머리를 잡고서 힘차게 내려쳐서 깨부수려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곤봉으로 적의 머리를 깨부수는 바로 이 이미지는 이후 3000년에 걸쳐서 고대 이집트에서 정복의 의미로 계속 사용되었다.

이집트학의 대가들은 바로 이 그림 속 사내가 나르메르라고 추정한다. 그 근거는 우뚝 선 사내의 머리 위에 새겨진 직사각형 속의 상형문자이다. 궁전을 상징하는 듯한 그 직사각형 안에는 물고기와 끌이 새겨져 있는데, 이집트어로 물고기는 나르(nar)이며 끌은 메르(mer)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이집트 문자 역시 뜻과 소리가 뒤섞여 사용됐다. 이 문서는 결국 나르메르의 통일 위업을 기리기 위해 국가 기관에서 제작한 일종의 기념 문서라 할 수 있다.

나르메르의 통일왕조 건립은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하게 한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강력한 정치권력이 형성되기 위해선 경제적 풍요가 필수적이다. 나일강 유역에선 일찍이 풍족한 곡물이 생산됐다. 어느 사회에서나 누구든 남아도는 곡물을 집적하게 되면 대규모 인원을 상시 고용할 수 있게 된다. 일단 그 인원은 경제활동 인구에서 제외되지만, 그들의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활용하면 대규모의 토목 사업을 벌일 수도 있고, 원거리 정복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규모 인력을 조직하게 되면 바로 거기서 정치권력이 생겨난다. 정치권력이 고도로 집중되면 군사적 정벌과 병합을 통한 통일제국의 건립이 가능해진다. 통일왕조의 수립은 경제력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대규모 수리 사업으로 나일강의 물줄기로 내륙까지 연결해 더 넓은 농지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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