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이영조 박사의 정치경제 까톡] 국민은 있어도 민족은 없다

[이영조 박사의 정치경제 까톡] 국민은 있어도 민족은 없다

기사승인 2024. 09. 10. 17:46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슬픈 라틴아메리카 잃어버린 100년 (3)
2024090301000316600018751
이영조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다음 단추는 자동으로 잘못 끼워지듯이 식민 초기의 제도와 관행은 이후에도 라틴아메리카에 짙은 그림자들을 드리우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회적 통합의 결여이다. 오랫동안 인디오는 지배와 착취의 대상에 불과했다. 같은 권리와 존엄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었다.

한국에서도 소개되었던 영화 '로메로'에 주목할 만한 장면이 하나 나온다. 개혁적인 젊은 농업장관이 암살된 후 그 미망인을 로메로 대주교가 위로하는 와중에 이 미망인이 자기 아들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언제 오면 좋겠느냐고 한다. 이에 대해 로메로 대주교는 유아세례는 한 달에 한 번 준다고 대답한다.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하지 못한 미망인이 다시 묻는다. 어느 날에 오면 되느냐고. 로메로는 개별적으로 유아세례를 주지 않으니 정해진 날에 오라고 한다. 그랬더니 이 미망인이 로메로에게 날카롭게 되묻는다. "우리 애가 인디오 애들과 같이 세례를 받으라는 말이냐?"고. 이 사건을 계기로 미망인은 로메로의 적으로 돌아선다.

이것이 라틴아메리카다. 국민은 있되 민족은 없다. 처음에는 인디오만 차별의 대상이었겠지만 이제는 인종이나 신분, 처지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체감의 대상이 아니다. 국적이 같으니 같은 국민이라고는 생각하겠지만,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인디오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는 인종이, 백인이 인구의 대부분인 나라에서는 흔히 부가 차별의 기준이 된다. 신분이 다른 사람들과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신분에 따라 사교클럽도 나누어져 있다. 신분이 다른 자기 나라 사람을 상대하기보다는 신분이 비슷한 외국인을 상대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덜 한 것이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다.

경험담.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필자가 살던 아파트 단지에 브라질에서 온 청소부가 있었다. 같은 단지에 살던 브라질 유학생 가족들은 이 사람과 서로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지냈다. 물론 같은 브라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섞지 않았다. 서로 말과 인사를 나눌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만 유학생들과도 청소부와도 인사를 하고 지냈다.

설마 하겠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아파트 구조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두 대 있다. 하나는 주인과 그 손님들이 사용하는 엘리베이터이고 다른 하나는 파출부나 기사 등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이다. 고급 아파트만 이런 게 아니다. 서민 아파트에도 어김없이 두 대의 엘리베이터가 있다. 만약에 '하인'이 주인용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 날로 해고다. 설사 주인이 봐주려고 해도 다른 주인들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주민과 아파트 경비는 서로 인사도 주고받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신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적 통합이 결여되어 있으니 무슨 일이 닥쳤을 때 누가 대아(大我)를 위해 소아(小我)를 희생하겠는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위험한 일을 누가 하려고 들겠는가? 가능한 한 비용은 부담하지 않으면서 목전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혈안이 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개혁이 거듭 실패한 데는 이러한 공동체 의식의 결여도 크게 한몫했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영조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