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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왜 폭군 히틀러(Hiter)에 관해 공부해야 하는가?

[강성학 칼럼] 왜 폭군 히틀러(Hiter)에 관해 공부해야 하는가?

기사승인 2024. 04. 2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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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아돌프 히틀러는 지금부터 79년 전 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이 다가오는 1945년 4월 30일 죽었다. 그는 20세기 현대정치에서 악의 화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의 공부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우리는 정치적 악을 알고 철저히 경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유대인 장교의 추천으로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진급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 장교가 말했듯이 그들은 히틀러에게서 어떤 리더십의 자질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30세가 될 때까지 단 한 번의 연설도 하지 않았으며 파티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소위 정당에 가입하여 7번째의 당원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3년 후에 그 정당을 이끌어 국가를 정복했다. 히틀러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정보의 갈증은 악이 덕보다 더 매력적이라는 증거이다. 히틀러가 세계적 상상력을 장악하는 주된 이유는 그가 인류 경험의 지평을 굉장히 넓혔다는 사실이다. 히틀러는 문명이 얼마나 빨리 야만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히틀러 정권은 문명화된 국민들의 목에 기초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심장에 기초했다. 히틀러는 결코 민주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 자신의 권력을 대중에 기초한 인기영합주의자였으며 카리스마적 선동가였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제국은 모든 현대 국가들처럼 무심한 관료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나치들은 항공기에 관해서 아주 무지했지만 그들의 지도자들은 라디오, 영화 그리고 관료제 같은 전쟁과 사회통제의 현대 기술들을 이용하는데 능숙했다. 히틀러의 천년 제국은 988년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레닌처럼 단순화하는 강박관념의 힘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가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서방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단지 인종의 자기보존 욕구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히틀러의 생애는 철의 법률과 자치적 과정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서 개인의 중요성에 관한 개념들은 마르크스처럼 거부했다. 그러나 강박관념에 의해 추동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원인을 지배할 수 없다. 즉, 그들은 멈출 수가 없다. 만일 히틀러가 1948년 10월 뮌헨 협정 이후나 프랑스가 패망한 1940년 6월에 멈추었다면 그는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럽을 단지 일상적으로 관리하는 따분함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히틀러는 극단적 급진주의자였다. 아인슈타인이 물질이 에너지라고 세상에 말했을 때 히틀러는 순수한 에너지의 정치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의 본질은 초조한 불만족이었다.

우리가 자유를 제약의 부재라는 현대적 정의를 수락할 만큼 어리석다면 히틀러는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는 어떤 양심의 가책이나 애정에 의해 전혀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그는 존 루카스(John Lukacs)가 20세기의 가장 널리 퍼진 어리석음이라고 부른 경제적 인간에 대한 믿음을 거부했다. 즉, 그는 인류가 경제적 계산에 의해서 움직이고 역사는 단지 갈등하는 이익집단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히틀러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지도자들인 처칠, 루스벨트, 그리고 스탈린도 경제에 관해서 잘 알지 못했거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들이 지도자였던 이유를 어느 정도 말해줄 것이다.

오늘날 한 개인이 어떤 차이를 만들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런저런 변증법과 비인간적 힘이 역사를 지배하는가를 설명하려는 역사와 정치이론들로 넘쳐나는 시대에 히틀러는 한 개인이 역사를 새로운 유형으로 비틀 수 있는 힘을 과시했다. 불행하게도 개선은 일반적으로 품위 있는 정치의 인내력, 즉 수은보다는 당밀처럼 움직이는 대중마음의 설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가속화는 나쁜 인간이 하는 일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바람과 함께 항해한다. 소수의 광신자만이 바람 속을 뚫고 들어간다. 히틀러는 바람을 일으키고 대중들을 먼지처럼 불어버렸다. 그렇다. 다른 사건들도 하나의 국가 공동체를 먼지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네빌 챔버레인 그리고 1940년의 프랑스같이 비틀거리는 것을 여지없이 뒤엎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세바스티안 하프너(Sebastian Haffner)가 말했듯이 히틀러는 비틀거리는 것을 알아보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역사는 인류의 내적 삶의 역사이다. 그리고 히틀러는 화가로서는 실패했지만 정치적 예술가였다. 그는 패배로 인해 굴욕당하고 인플레이션으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공허한 아픔을 무엇이 달랠 수 있을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셋(Ortega y Gasset)은 천재를 자신의 직업을 발명하는 능력으로 정의했다. 히틀러는 정치에 입문할 때까지 안정된 직업을 결코 갖지 않았다. 그의 첫 공직은 독일의 수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도자(Fuehrer)'의 직업을 발명했다. 그 직업은 심각한 나치즘처럼 그와 함께 사라졌다. 그는 정치를 내적 혼란의 연장으로 만들었으며 역사를 자기의 개인 전기로 간주했다. 히틀러에 대한 매혹은 인류에게 비추는 하나의 '검은 거울'이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다양한 인간의 가능성들을 제시했다. 그의 역사드라마 중에서 가장 사나이다운 <헨리왕 5세>(King Henry V)가 20세기의 대범한 윈스턴 처칠의 위대성을 상기시킨다면, 그의 최악의 폭군 <리처드 3세>(Richard III)는 의문이 여지없이 히틀러를 상기시킨다. 여기에 정치의 최선과 최악이 있다. 인류의 올바른 연구는 인간에 관한 것이다. 인류의 명성에 아무리 해가 되어도 히틀러는 인간이었다. 그는 분명히 인간의 한 가능성이다. 질병의 경우에서처럼 히틀러의 이해는 죽음으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치료제 연구는 죽음의 연구로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현대정치의 연구는 악마의 정치를 실천했던 히틀러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나쁜 지식만 있으면 그것도 사용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군 히틀러를 공부할 땐 반드시 위대한 지도자 윈스턴 처칠과 비교하는 공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리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가 1965년 위스턴 처칠의 서거 다음 날 "처칠의 죽음은 정치학도들에게 자신들의 한계를 상기시킨다"고 지적했다. 환언하면, 이제 사회과학이 되어버린 정치학은 처칠 같은 위대한 정치지도자에 관해서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정치학에게 정치적 위대성, 인간적 탁월성의 정점들을 상기시키는 것보다도 더 높고 또 절박한 의무는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지도자의 위대성과 비참함, 그들의 탁월성과 그들의 타락, 그들의 고결함과 그들의 승리, 그리고 제아무리 현란해도 평범한 인물을 진정한 위인으로 결코 착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정치적 악마성을 간과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셰익스피어 방식으로 말한다면,진정으로 '사나이'다운 정치가와 미친 '폭군' 간의 대조야말로 인간들이 언제든지 배워야 할 가장 위대한 교훈들 가운데 하나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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