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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930~1940년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 교내에서 학생 항일비밀결사 태극단, 연구회, 상록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상교 선생은 1923년 11월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이던 1942년 5월 태극단을 조직했다. 결성 직후 1년 여간 비밀리에 단원을 모집한 후 이듬해 4월 조직 재정비 과정에서 체육국장으로 선임됐다. 그는 대부분 대구상업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태극단을 이끌며 전국적인 조직망 수립을 모색했다.
그러나 밀고로 1943년 5월 23일 단장이 붙잡히고 연이어 서 선생을 포함한 단원 전원이 피체됐다. 서 선생은 학생이었던 1944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최낙철 선생은 1921년 11월 전북 무주에서 태어났고 대구사범학교 5학년 재학 중이던 1941년 1월 연구회를 조직했다. 사범학교의 교과목을 중심으로 14부를 편성한 연구회에서 최 선생은 지리부 책임을 맡았다.
졸업 후 함북 나진의 약초공립국민학교에 부임해 교사로 재직하던 중 대구사범학교의 항일비밀결사 활동이 적발되면서 일경에게 붙잡혔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그는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신기철 선생은 1922년 1월 강원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재학했다. 1937년 3월 상록회가 결성된 후 1938년 2월 새로운 임원진이 구성됐다.
신 선생은 동료의 권유로 입회해 서적계 책임을 맡았다. 이어 신규 회원 가입을 위해 활동하던 그는 같은 해 10월 회장직을 겸임했으며 학교에서 벌어지는 민족 차별대우를 논의하는 회의를 주도했다.
1938년 상록회의 활동이 드러나면서 관련자 137명이 대대적으로 체포됐다. 이 중 신 선생을 포함한 36명이 검찰에 송치됐다. 신 선생은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