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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피라미드, 3000년 고대 이집트 문명을 지탱한 문화적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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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3. 30. 17:56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 피라미드는 과연 무덤이었나?

4600년 전 기자 피라미드 단지에는 세 개의 거대한 피라미드와 여섯 개의 작은 피라미드들이 세워졌다. 세 개의 거대한 피라미드는 삼대(三代)에 걸친 세 명의 파라오, 곧 쿠푸(Khufu), 카프레(Khafre), 멘카우레(Menkaure)가 안장된 무덤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대피라미드의 동쪽과 남서쪽에는 각각 세 개의 작은 피라미드가 들어서 있는데, 파라오의 모친, 부인, 딸 등을 위해 지어졌다고 추정된다.

피라미드 문서(pyramids texts)라 불리는 후대의 기록에는 파라오의 사후 여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는 점, 장례에 사용된 부장품이 발견됐다는 점, 그리고 공들여 제작된 대형 화강암 석관이 피라미드 중심부에 놓여 있다는 점 등은 피라미드가 무덤이라는 학설의 강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놀랍게도 지금껏 주유 피라미드에선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다. 본래 석관 속에 미라가 안장돼 있었는데 도굴꾼이 피라미드를 털어갔다는 주장도 있고, 파라오의 미라인 만큼 사전에 도굴 방지를 위해서 따로 은닉처를 마련했다는 학설도 있다. 어느 쪽이 옳든 파라오의 무덤 피라미드에 파라오의 미라가 없다면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황제의 거처인 궁궐에 황제의 침실이 없다는 소리만큼이나.

◇ 피라미드, 단순한 무덤 이상의 무덤

일반론에 반하는 여러 학자나 저널리스트의 반론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피라미드가 무덤이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 생산 공장이었다는 가설, 오리온성좌의 배열에 따라 정교하게 설계된 천문학적 건축물이라는 견해, 수만 년 전 번성하다 운석 충돌 등의 재앙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태고의 고도 문명의 건축물이라는 추측성 주장까지 많은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외계인 미도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피라미드가 진정 무덤이었다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대체 왜 권력자의 무덤을 산처럼 웅장하고 신전처럼 성대하게 지어야만 했을까요? 죽어서 다시 영원히 살고 싶어 했던 고대인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을까요? 파라오는 그러한 사후 세계의 전설을 신실하게 믿어서 죽어서 다시 영원히 살기 위한 절박한 심정으로 피라미드의 건축을 발주했을까요? 피라미드를 지어야만 했던 또 다른 이유는 진정 없었을까요?"

문명사의 모든 기획이 그렇지만 대규모 사업에는 항상 여러 목적이 뒤섞여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파라오의 무덤으로 건축되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그 정도 규모의 건축물이라면 무덤 이상의 수많은 정치적·사회적·경제적·군사적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정 고대 이집트인들은 왜 하필 피라미드형의 대규모 거석 기념물을 만들어야만 했을까?

중요한 사실은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비롯해 고대 이집트의 주요 피라미드는 모두 통일 국가가 들어서던 문명의 초창기에 완공되었다는 점이다. 3000여 년의 장구한 고대 이집트 문명사에서 피라미드의 건축은 가장 초창기의 업적이었다. 피라미드의 제작에는 실로 막대한 노동력, 재원, 시간이 들 수밖에 없다. 피라미드는 하늘 향해 146.6m나 치솟은 높은 사각뿔의 석조 구조물이다. 수천
년 동안 전 인류가 경탄해 마지않은 피라미드는 단순한 무덤 이상의 무덤이었다.
우나스(Unas) 피라미드 내부에서 발견된 석관
기원전 2350년경 건설된 우나스(Unas) 피라미드 내부에서 발견된 석관. 벽에 새겨진 피라미드 텍스트는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이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물이다.

◇ 거석 기념물, 강압적 대중 동원으로 이룰 수 없어

학계의 정설에 따르면, 기자 대피라미드를 짓기 위해서 2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공학자, 건축가, 숙련 장인 등 연평균 5000명의 정규 노동 인력과 1만5000명에서 2만명에 달하는 임시직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과거에는 피라미드가 노예 노동으로 건축되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피라미드 주변의 주거지나 공동묘지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나일강이 범람하는 농한기에 보통 농
부들이 자발적으로 임금을 받고서 피라미드 건축에 참여했다고 주장한다.

상식적으로 어느 시대 어느 정권도 권력자 일인의 사후 안녕을 보장한다는 명목만으로 장시간에 걸쳐서 대규모의 토목 사업을 벌일 수는 없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사마천(司馬遷)이 실감 나게 묘사했듯 진(秦) 제국이 단명한 이유 중엔 대규모 토목 공사에 끌려간 장삼이사의 불만이 큰 몫을 차지했다. 진 제국 치하에서 백성들이 만리장성과 아방궁 건축 등 대규모 토목 공사에 불려 나가 강제노역에 시달렸기에 진승(陳勝)·오광(吳廣)은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냐?" 외치며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1958~1962년 중국에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깃발 아래 수억 명 노동자들에게 총동원 명령을 내려서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토목 사업을 전국적으로 벌였지만, 당시 급조된 대규모 댐 중 여럿이 20년을 못 가서 무너졌으며, 최대 4500만 명이 아사하는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이 들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진시황이나 마오쩌둥처럼 강압적 대중 동원의 방식으로 피라미드를 지으려 했다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피라미드와 같은 기념비적 거석 구조물이 세워지려면, 당대 최고 전문 인력의 창의력, 상상력, 실험정신, 건축 및
공학 기술이 필요할뿐더러 자발적으로 공사에 참여하길 원하는 대규모 노동 인력의 효율적 투입이 필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와 같은 희대의 걸작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선 공사를 맡은 전문 인력뿐만 아니라 보통 일꾼들에게도 충분한 물질적 보상을 베풀어야만 한다. 막강한 경제력을 가졌기에 파라오는 최고의 인재를 피라미드 제작에 몰두할 수 있게 지원할 수 있었고, 농한기 농민들을 자발적으로 끌어들여 신나게 230만 개가 넘는 2.5톤에서 15톤에 달하는 거대한 석회암 더미를 차곡차곡 쌓아 올릴 수 있었다. 진시황이나 마오쩌둥의 실패 사례가 반증하듯 피라미드와 같은 걸작의 거석 기념물이 완성되기 위해선 인민의 자발적 참여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기자 피라미드 단지의 스핑크스
기자 피라미드 단지의 스핑크스. 19세기 후반

◇ 피라미드 건축, 고대 이집트 문명의 장수 비결

폭압과 학정으로 백성을 괴롭혔다는 진 제국은 불과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진 제국과 대조적으로 고대 이집트 국가는 지구인의 문명사에서 가장 오랜 시간 존속될 수 있었다. 최소 4600년 세월 지구인의 문명사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일컬어지는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정신이상자인 폭군이 창칼을 들고 노예들을 윽박질러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피라미드는 단순한 돌무덤이 아니라 최고 수준의 천문학적 지식과 건축공학적 기술과 미학적 창의성이 합쳐진 인류사 최고의 걸작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지구라트(ziggurat)라 불리는 테라스형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제작했지만, 무덤이 아니라 신전이라 여겨진다. 이집트 피라미드와는 달리 지구라트는 내부에 비어 있는 공간이 없고, 꼭대기에 실제로 신전이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에 비하면 우르(Uru) 지구라트는 높이는 5분의 1, 바닥 면적은 6%에도 못 미치는 작은 규모였다.

두 문명을 비교해 보면 더더욱 피라미드가 과연 단순한 무덤이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본연의 목적이 설명 파라오의 무덤이었다고 해도 이집트 문명의 상징물로서 피라미드는 전 이집트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문화적 통합력을 발휘했다면 그저 단순한 왕의 무덤에 머물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고대 어느 문명이나 거석 기념물을 제작했지만,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압도할 만한 대규모 걸작품은 없다. 그 점에서 피라미드는 파라오에서 평민까지 고대 이집트인의 집체적 열망이 응결된 공동의 상징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가 3000년 동안 고대 이집트 문명을 지탱한 문화적 기둥이었다면 과언일까?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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