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주도 수업과 진로 설계
고교학점제 전면 시행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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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오전 서울 관악구 당곡고등학교 4층 '스마트 콘텐츠 실무' 수업 현장. 학생들은 태블릿을 펼쳐놓고 자신이 개발한 'AI 번역기 앱'을 테스트 중이었다. 이날 과제는 해외여행 상황을 가정해 실생활에 활용 가능한 번역기 어플리캐이션(앱)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스마트 콘텐츠 실무는 당곡고의 소프트웨어 중심 교육과정으로,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실습을 통해 논리적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도록 설계됐다. 정병희 교사는 "AI 교육은 자료구조, 알고리즘, 데이터 분석까지 포함하는 학습"이라며 "교사들도 끊임없이 배우며 수업을 재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수업은 당곡고뿐 아니라 수도여고, 신림고 등 인근 학교 학생들도 참여하는 공동교육과정(공유캠퍼스) 형태로 운영됐으며, 교사는 대형 스크린과 채팅창을 활용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수업을 진행했다.
심지민(2학년 9반) 학생은 "고교학점제를 통해 '세계문제와 미래사회' '스마트 콘텐츠 실무' 같은 수업을 듣고 진로가 구체화됐다"며 "이런 수업은 다른 학교에서는 듣기 어려워 꼭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 같은 반 김경민 학생도 "쉬운 과목보다는 적성에 맞는 과목을 골라야 내신도 잘 나온다"며 "친구들도 대부분 진로를 중심으로 과목을 선택한다"고 전했다.
문·이과의 경계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신은지(2학년 6반) 학생은 "과탐과 사탐을 하나씩 선택해 융합형 시간표를 구성했다"며 "담임교사와 진로 코디네이터의 상담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고교학점제가 2025학년도부터 전국 고등학교 1학년에 전면 도입됐다. 기존 일률적인 교과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학점을 이수하는 방식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이를 위해 교육과정이수지도팀을 구성하고, 거거점학교·공유캠퍼스·서울온라인학교를 통해 과목 선택의 폭을 넓혔다. 또한 △선택과목 설명회 △1대 1 진학상담 △대학 전공 체험 △진로직업박람회 △SEN 진로진학 앱 등도 통해 학생들의 과목 선택과 진로 설계를 지원하고 있다.
특히 1학년부터 진로 탐색을 시작해 연중 상담과 과목 수요조사, 수강 신청을 거쳐 '나만의 시간표'를 설계하는 체계를 운영 중이다. 담임, 진로 담당 교사, 외부 코디네이터가 함께 참여해 개별 학업 설계를 돕는다.
배덕희 교사는 "고교학점제의 핵심은 '낙오 없는 교육'"이라며 "성취율 40% 이상을 위해 방과 후까지 추가 지도를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당곡고는 2024학년도 수시 전형에서 소프트웨어 관련 학과 진학률이 20%를 넘기는 성과를 냈다.
당곡고는 고교학점제 시행의 선도 모델이다. 2019년부터 연구학교로 지정된 이 학교는 학생 주도 수업, 공동교육과정, 소프트웨어 특성화 등 다양한 실험을 교육현장에 적용해 왔다.
학교 공간도 학생 중심으로 재편됐다. 당곡고의 1층 중앙현관을 개조한 '지혜의 숲'은 학생들이 여유 시간에 쉴 수 있는 학생 휴게 공간이다. AI교육센터에서는 인공지능, 피지컬 컴퓨팅, 데이터 분석 등 실습 중심 수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협업실'과 '인사이트홀'은 팀 프로젝트와 발표, 토론 수업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됐다.
정남희 당곡고 교장은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스스로 진로를 설계하고 과목을 선택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교육의 본질을 바꾸는 일"이라며 "수업 방식은 물론, 공간·평가·상담 구조까지 학교 전반이 학생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근식 교육감도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주도적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교육의 출발점"이라며 "시교육청은 이 변화가 현장에서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더욱 촘촘히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