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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의 안보정론] 베트남 파병 한국군은 ‘민간인 학살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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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3. 12. 18:07

김태우 웹용 사진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전 통일연구원장)
온 국민의 관심이 대통령 탄핵 문제에 쏠린 사이 1월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부에서는 두고두고 대한민국에 상처로 남을 수 있는 판결이 있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2월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청룡부대 군인들에 의해 가족을 잃은 응우옌티탄 씨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2심에서 2023년 2월 7일 1심 판결과 같이 "대한민국은 배상금 3000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 사건의 출발점은 1990년대에 호찌민에 유학했던 구모씨였다. 그는 참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연구하면서 자료들을 한국에 보냈고, H 주간지는 장기간에 걸쳐 게재했다. 이후 진보성향 변호사와 학자들이 가세하여 손배소를 청구할 베트남인을 찾았다. 즉, 재판의 사실상의 원고는 사건을 한국 법정으로 가져가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던 구씨와 그가 설립한 한·베트남평화재단, 진보성향 언론사, 변호사 등이었고, 응우옌티탄은 이들의 각본에 따라 움직였다. 이후에도 한·베트남평화재단은 '평화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지로 데려가 위령비에 참배하게 했다. 이 재단의 이사장 강모 주교는 제주교구장 시절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여 정부와 해군을 힘들게 했던 인사다. 2심 판결 후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라는 단체는 '마침내 정의가 구현되었다'며 환호했고, '한·베평화재단'의 홈페이지는 환영 문구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안보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낳아주고 입혀준 부모에게 상처를 내놓고 좋아하는 철부지들로 보일 수도 있다.

◇ 세계적 추세나 사례와 다른 유별난 판결

대부분의 나라들은 국제적인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국익'을 배려한다. 파병된 자국군에 의한 범죄에 대해서도 증거의 불충분성, 합의, 시효의 소멸 등 자국군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릴 사유가 있으면 그것들을 적극 활용한다. 1968년 베트남 미라이 촌락에서는 미군 1개 중대가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지만, 미국 법정은 소대장 윌리엄 켈리 중위만을 3년 반 가택연금 후 사면했다. 민간인으로 위장한 베트콩의 기습으로 수많은 전우가 희생되는 것을 목도한 중대원들의 경계심을 감안하여 자국군을 처벌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쟁사를 보면 패전국의 책임자들이 처벌받은 사례는 많지만, 민간인 피해자 개개인이 배상을 청구한 사례는 거의 없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2차 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600만명 학살, 1945년 2월 30만명의 독일시민을 살상한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 1945년 8월 수십만 명의 일본인과 수만 명의 한국인을 살상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등은 상대의 전쟁 의지를 꺾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행된 민간인 살상이었지만, 모두 '정부 대 정부'의 문제로 처리되었다. 독일은 이스라엘에 반복적으로 유감을 표하면서 국가 차원에서 보상했고, 미국은 일본을 동맹국으로 받아들이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도록 도왔다. 한국도 베트남에 대해 그렇게 했다.

전쟁에서 희생된 민간들에 대한 보살핌은 결국 자국 정부의 몫이다. 일본은 '피폭 수첩'을 만들어 원폭 희생자들을 돌보았고, 6·25 동안 북한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자들을 보살피는 것도 국가보훈처의 소임이다. 미군에 의한 노근리 사건도 그렇게 처리되었다. 한국 정부는 2004년 '노근리 특별법' 제정을 통해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의료지원금을 지급했으며 평화기념관을 건립했다. 6·25 동안 미국은 3만 6940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부상 후 사망자를 합치면 5만4000명을 희생시키면서 한국을 공산화로부터 지켜주었다. 이후 한국은 한미동맹이 제공하는 안보방패와 안정성 위에서 경제기적을 이루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 응우옌티탄 사건에 적용되어야 하는 세 가지 기준

'진실 규명'과 '법과 양심'은 모든 재판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2대 기준이지만 국가 간 이해가 뒤섞인 국제사건에서는 '국익'이라는 또 하나의 기준이 있으며, 대다수 나라들은 이 기준을 중시한다. 하지만 한국 법정이 이 기준을 중시한 흔적은 별로 없다. 한국군은 연인원 32만명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5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들의 죽음은 국가안보와 경제기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래서 참전용사들은 "국가의 부름에 순응하여 이름 모를 정글에서 목숨 바쳐 싸웠는데 이제 와서 민간인 학살자로 낙인찍혀야 하느냐"며 울분을 토한다. 이렇듯 1, 2심 판결은 안보, 국방, 외교, 교육, 재정 등에 큰 국익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참전군인들의 명예를 추락시켜 군의 사기를 저하하고 장병들의 파병 기피를 유발할 수 있고, 애국을 배우면서 자라야 하는 세대들에게 할아버지 세대의 한국군을 '나쁜 사람들'로 각인시킬 수 있다. 많은 베트남인이 잇달아 손해배상을 청구할 가능성도 있다.

베트남은 피아(彼我) 구분이 안 되는 상태에서 일순간 방심으로 위장 민간인의 매복·기습으로 비참한 죽임을 당했던 전쟁터였다. 그럼에도 한국군은 수십만 톤의 구호식량에 더하여 영농 지원, 공공시설 건설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대민봉사 활동을 펼쳤다. 1986년 베트남이 '도이모이(Doi Moi) 정책'을 통해 개혁개방을 표방한 후 한국은 1992년 베트남과 수교했고, 이후 30억 달러의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각종 인프라를 건설하고 보건 지원을 제공했다. 베트남 정부도 양국관계 발전이 중요하다며, 한국 정부의 '참전 유감' 표명을 사양했다. 오늘날 베트남은 한국의 3대 수출시장이며 근로자, 유학생 등 20만여 명의 베트남인들이 한국에 살고 있으며 베트남인 며느리들의 아들들이 한국군에 입대한다. 한국 법정이 이런 사실들을 충분히 고려한 것 같지는 않다. 베트남인이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한 약정서를 인정하지 않았고, 민법이 정한 10년의 시효 만료도 당시 피해자가 7세의 어린이여서 권리 행사가 불가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 성숙한 법치국가가 되기 위한 당연한 비용이길 바란다

이번 손배소를 추진한 한국인들이 진실, 정의, 법치, 인도주의, 양심 등을 향한 순수한 열정에서 그렇게 했다면, 한국 국민은 패소가 최종 확정될 경우 감당해야 할 부담과 국익 손실을 한국이 성숙한 법치국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불해야 하는 당연한 비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역사는 베트남 정부와 국민이 손해배상을 요구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굳이 55년 전의 일을 들추고 베트남인 청구인을 찾아 사건을 법정으로 가져간 한국인들과 언론 그리고 변호사들은 조국 대한민국에 두고두고 남을 수 있는 상처를 입힌 철부지들로 기록할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가닥 희망을 대법원의 최종심에 걸어본다.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전 통일연구원장)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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