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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文香世談] 캉디드와 들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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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2. 2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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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빈 들녘을 걷는다. 햇살의 온기가 느껴지지만, 바람은 여전히 차갑다. 아직 남은 이삭을 찾는 새들의 눈이 매섭다. 발걸음을 멈추고 언 땅에 귀를 댄다. 봄이 진군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직이 다가오는 발소리,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부드럽지만, 인간의 고함보다 힘이 있고 생기가 넘친다. 광장의 저 처절한 함성이 다가오는 봄을 더 화사하고 찬란하게 할 수 있을까?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라이프니츠는 철저한 낙관주의자로 절대적 결정론을 대표한다. 그는 우리가 사는 우주는 전체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조화롭고 완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악의 개념이 없으면 선이 없고, 부조화가 없으면 조화도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사건과 존재는 반드시 필연적인 충족 이유가 있기에 모든 것은 정당하다고 했다. 운명은 우리를 이롭게 하기 위한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세상만사는 최선의 결과를 향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얽혀있다. 라이프니츠는 "만약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만큼 덜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악이란 완전한 세상을 이루는 데 불가피한 요소이기 때문에 멀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기며 고마워해야 한다고도 했다.

어수선하고 혼란한 시국 때문에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볼테르의 단편소설 '캉디드'를 펼쳐본다. 어느 귀족의 성에 아주 착한 성격의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단순하고 생각은 올곧았다. 그는 '순진하고 천진난만'하여 그 뜻을 가진 '캉디드(Candide)'라고 불렸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신봉하는 가정교사 팡그로스는 캉디드에게 '형이상학적 신학과 우주학'을 가르쳤다. 그는 라이프니츠 추종자답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있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어수룩한 제자 캉디드는 스승의 말을 다 믿는다. 그는 성에서 같이 교육받던 영주의 아름다운 딸 큐네공드와 사랑에 빠져 키스하다가 들켜 쫓겨난다.

캉디드는 운명의 소용돌이를 따라 유랑한다.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려 했지만, 쉽사리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 그는 강도를 만나 사경을 헤매기도 하고, 세계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다양한 악과 부조리와 부딪히면서 팡그로스의 낙관주의를 회의하게 된다. 캉디드는 이런저런 힘겨운 일과 악을 만나면서 "과연 이 일은 필연인 것이 맞는가?"라고 외치기도 한다. 볼테르는 캉디드의 입을 통해 극단적 낙관주의에 항변한다. "당신의 목을 매달고 팔다리를 잘라내고 잔인하게 두드려 박고 강제로 미소 짓게 해도 모든 것이 최선의 상태에 있다고 보겠어요?"라고 반문하며 "모든 것이 잘되지 않는데 다 잘된다고 우기는 것은 일종의 광증이다"라고 비판한다.
캉디드는 떠돌다가 '모든 것은 최악의 상태'에 있다고 믿는 극단적 세계관을 가진 마르탱을 만난다. 마르탱은 "아무도 갈 수 없는 지상 천국에 존재하는 이들을 빼놓고 이 세상엔 덕 있는 사람도 행복한 사람도 거의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지구가 생긴 이유는 "우리들을 미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캉디드는 이 철저한 비관주의자에게 "하지만 세상엔 그래도 좀 좋은 것이 있지 않아요?"라고 항거한다.

캉디드는 터키에서 만난 수도사에게 질문한다. "우리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무슨 까닭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괴상한 동물이 만들어졌는지를 당신에게 묻고 싶어서입니다." "왜 당신들은 그런 걱정을 합니까? 그런 문제가 당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냔 말이오?" "하지만, 수도사님, 세상에는 끔찍이도 악이 많아요." "악이 있든 선이 있든 무슨 상관이오? 왕께서 이집트에 선박을 보낼 때, 그 왕이 선박 안에 끼어든 생쥐가 불편할지 아닐지를 걱정하시겠소?" 인간은 우연히 이집트로 떠나는 선박 안에 끼어들게 된 생쥐와 같다는 말이다. 생쥐가 할 일은 가마니 속의 곡식을 요령껏 몰래 갉아 먹는 일이다. 인간이란 이런 존재인가?

캉디드는 터키에서 헤어졌던 애인 큐네공드와 재회한다. 그는 터키 농부를 만나 팡그로스와 마르탱의 극단적 세계관을 버리고 농부의 중용적 세계관과 미덕을 따른다.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은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처럼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렇다고 절망해야 할 정도도 아니다. 인간 세상이란 괴로움도 있지만 즐거움도 있다. 인간은 분수에 맞게 괴로움을 극복함으로써 조금씩이나마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보면 '완전'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그냥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 세상은 왜 이렇게 탐욕과 부조리, 악과 불의가 가득하고 슬픔과 고통으로 신음하는가? 이 땅의 순진한 캉디드들이여, 해동하는 대지에 귀 대보라. 대자연의 합창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자연은 구성원 각자의 고유한 목소리를 존중한다. 작다고 묵살하지 않고, 목청이 높다고 특별대우하지 않는다. 자연은 상호 조화와 상생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 화음은 조화롭고 스케일은 웅장하면서도 섬세하다. 오늘의 국내외 상황은 상생보다 상사(相死)를 향해 돌진하는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봄날의 화원을 꿈꾸며 기다린다. 그게 삶이다. 차가운 바람이 몇 차례 더 거세게 몰아치겠지만, 자연은, 우리는 그 모든 난관을 이겨낼 것이다. 꽃샘바람 시샘해도 꽃은 스스로 피어나는 법이다.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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