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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는 간략하다. 도쿄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산세가 험하고 물 맑은 산골마을 하라사와, 그곳에 공동체를 이루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개척을 위해 이주한 토착민 3세대인 타쿠미는 마을의 심부름센터를 자처하며 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자다. 어린 딸과 단둘이 깊은 숲 외딴집에 머물며 소바 장사를 하는 가게에 맑은 샘물을 공급해 주기도 하고 음식 재료로 쓰일 나물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러저러한 마을 일을 도맡아 하는 성실한 일꾼이다. 그의 일과는 단순해 보인다. 물을 긷고 장작을 패고 가끔 마을 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문제가 있다면 건망증 때문에 아랫마을로 학교에 다니는 딸 하나를 데리러 가는 일을 깜박하곤 한다.
고요하기만한 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글램핑 장이 들어선다며 주민간담회가 열린다. 한 유명 연예기획사에서 마을 상류의 토지를 매입하여 레저 사업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 목적이 정부의 보조금에 있었기 때문에 착공 계획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특히나 상류에 캠핑장이 들어서면 마을로 흐르는 하천이 오염될 우려가 있고, 게다가 무분별한 야영객의 유입으로 산불의 위험이 배가되기에 사업 추진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만 글램핑 장이 유치될 경우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24시간 관리자가 상주할 것과 하수처리를 위한 완벽한 정화시설을 설계에 추가할 것을 전제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여지를 남겨준다.
회사를 대표하여 주민들을 설득하러 간담회에 참석했던 연예기획사 직원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사장에게 주민들의 뜻을 전한다. 그러나 컨설팅회사의 기만책만을 따르며 보조금을 착복하는 것에만 혈안이 돼 있는 사장의 태도를 보고 이들은 회의적으로 생각이 바뀐다. 그런데도 사장의 명령으로 다시 마을로 돌아와 타쿠미를 찾는다. 장작을 패는 타쿠미의 모습을 보던 타카하시는 자신도 따라 해 보고 싶어 한다. 자연스럽게 숲에 동화된 타쿠미의 삶에 매료된 그는 글램핑 장이 준공되면 자신이 관리자로 상주할 것을 자처한다. 온갖 기만과 착취가 일상인 자신의 업무에 진저리가 나 있던 타쿠하시에겐 회사를 관두지 않으면서도 시골로 내려와 새롭게 충만한 삶을 도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극의 오 분의 사를 차지한다. 백여 분의 짧은 러닝 타임이 거의 다 지나고 남은 십여 분은 타쿠미와 타카하시가 숲에서 길을 잃은 딸 하나를 찾는 신으로 채워져 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존 상업영화의 문법과는 판이하다. 그래서 지나치게 직접적인 제목으로 인해 도대체 누가 악인가를 쫓는 관객의 여정은 대부분 배반당한다. 누가 악이랄 것도 없이 서로의 생각이 다르지만 상호 간에 양보와 동화라는 양태로 전개되기 때문에 반전이 있을 수도 없다. 다만 영화 초반부터 진즉에 배치한 타쿠미의 딸 하나의 실종이 극의 후반부에 기어이 일어났다는 것이 상투성을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복할 뿐이다.
하나의 실종을 암시한 쇼트는 앞에서 정리한 간단한 스토리라인에 반복적으로 배치돼 있다. 멀리서 들리는 사냥꾼들의 총소리, 빗맞은 총상으로 인해 고통받다가 죽어 해골이 돼버린 어린 사슴의 사체, 부상으로 도망칠 수 없는 새끼를 지키고 서 있는 어미 사슴의 가공할 폭력에 대한 타쿠미의 자세한 설명 등이 바로 그것이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다가 전술한 상태의 사슴 모자를 만난 하나는 기어이 그 희생양이 된다. 그런 하나를 발견하고 달려가는 타카하시. 그런데 그 순간 느닷없이 타쿠미는 타가하시의 목을 졸라 살해한다. 그러고 나서 타쿠미는 죽은 딸 하나를 안아 들고 어두운 숲으로 사라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 전개로 감독은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가?
여기서부터는 서사 내부의 내재적 관점에서, 영화 외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지점이다. 세 사람이나 실종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경찰이 나선다. 먼저 타카하시의 시신이 발견된다. 멀지 않은 곳에 하나가 공격당해 피를 흘렸던 흔적을 찾는다. 타쿠미는 실종 상태다. 하나의 시신 역시 발견되지 않는다. 미제로 남겨진 사건의 잠정적 결론은 글램핑 장 건설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타카하시가 하나를 인질로 삼아 타쿠미를 협박한다. 딸 하나를 잃은 타쿠미는 이성을 잃고 타카하시를 살해한다. 끝으로 죽은 하나를 안고 어디론가 사라진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로써 글램핑 장은 들어서지 않고 숲과 맑은 물을 품은 하천은 보호된다. 사슴 역시 무죄다.
극의 중반부에서 연예기획사 직원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간간히 숲에서 들려오는 사냥꾼들의 총소리를 듣고 대화를 나눈다. 둘 다 총소리를 처음 들어 보았다고 말한다. 이로써 은연중에 세계 관객에게 일본에 대한 각인된 기존의 인식을 각성케 한다. 전쟁을 모르는 평화로운 물의 나라 일본의 이미지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영리하게도 감독은 체제 수호적인 방식으로 일본의 이데올로기 전략을 해체한다. 아베 정권 이후 이미 극우화된 정부의 기조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고, 한편에선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생성된 오염수를 무단으로 해양에 투기한 무도함을 은폐 엄폐한다. 그런데도 일본 극우의 중추가 되는 사사카와 평화재단(일본 재단)이 끊임없이 시도하는 고도의 홍보 전략은 지금도 진실을 왜곡하고 평화로 이미지화된 일본을 재생산하고 있다. 이에 관한 해체적 보고서가 바로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분명한 이미지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난히 태양처럼 사방으로 분산되는 자동차의 서치라이트와 타쿠미의 SUV 차후면 유리창 와이퍼 자국에 비춘 햇빛은 흡사 욱일기와 닮았다. 따라서 타쿠미는 일종의 가디언으로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가치를 수호하는 인물로 상징된다. 해석의 여지에 따라 체제 수호적이던지 혹은 그와는 정반대로 체제 비판적으로도 볼 수 있는 이런 유형의 영화가 최근 세계 영화제를 휩쓸고 있는 경향이 뚜렷하다. 아무튼지 징후적이지 않을 수 없는데, 굳이 문제라면 그들 영화가 상당히 훌륭하다는 데 있다.
그런데 지난 13일, 일본 정부는 방류 1년 반 만에, 조용히 후쿠시마 오염수 탱크 해체를 개시했다고 한다. 여하하든 양극단에서 일본은 자기중심적으로만 제 살길을 모색하기 바쁜 모양새이다. 우리도 어서 빨리 내란 정국이 수습되어, 이와 같은 문제에 관해서 대내외적으로 기민한 대처와 외교정책을 펼칠 수 있는 정부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