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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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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1. 07. 11:01

이황석 문화평론가
사형에 관한 영화를 꼽자면, 폴란드의 거장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1988년 작)'을 들 수 있겠다. 성경의 십계명을 모티브로 한 연작 드라마 '데칼로그'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 개봉 당시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바 있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사형제도에 대해 심도 있게 문제를 제기한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간결하다. 극의 전반부는 주인공 야체크가 아무 이유 없이 택시운전사를 살해하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반면 후반부는 대부분의 과정이 생략된 채,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가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으로 배치돼 있다. 이와 같은 플롯은 주인공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감정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두 개의 살인 과정은 그 묘사에 있어 끔찍하다 못해 지저분하다. 영화 또는 게임과 같은 매체를 통해 체험하는 '깔끔한 살인'과는 거리가 멀다. 감정이 거세된 살인의 간접경험을 무색하게 만든다. 모든 살인은 죽은 이에게도 죽인 자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남기기 마련이다. 계획적이건 우발적이건 상관없이 미치지 않고선 누군가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에 죽지 않는 피해자의 머리를 여러 차례 둔기로 내리치는 장면은 흉측하다. 여러 명의 간수와 교도관이 집행하는 교수형 장면 또한 망측하긴 마찬가지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감독은 개인이 벌이는 살인과 사회적 통제시스템이 수행하는 살해 행위를 등가시킨다. 이로써 키에슬로프스키는 관객으로 하여금 제도로서 사형에 대해 재고할 것을 주문한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에 못지않은 작품으론,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팀 로빈스가 메가폰을 잡은 '데드 맨 워킹(1995년 작)'이 있다. 명배우 숀 펜과 수잔 서랜든이 주인공을 맡아 열연했으며, 연출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사형수 매튜 폰스렛(숀 펜 분)은 무죄를 주장하며, 헬렌 수녀(수잔 서랜드 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다. 매튜는 데이트하는 어린 연인을 강간하고 무참하게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고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다. 변호인을 구하지 못해 상고할 수 없는 그가 마지막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자, 빈민 운동으로 저명한 헬렌에게 구명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응답하여 그녀는 그를 면회하러 교도소로 간다.

헬렌 수녀는 진솔한 대화를 통해 무죄를 주장하는 매튜를 믿어 보지만, 히틀러와 나치를 찬양하고 거침없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일삼는 그의 행태로 인해 의심을 품는다. 게다가 그를 변호한다는 이유로 피해자 가족의 원망과 사회적 지탄까지 받게 된다. 그런데도 헬렌 수녀는 사형을 당하는 순간까지 그의 마지막을 함께한다. 일종의 구원자로서 역할을 자청한 것이다. 이에 감흥이라도 받은 걸까, 사형장에서 마지막 남길 말을 허락받은 매트는 그간에 무죄를 주장하던 것과는 달리,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한다.

두 영화 모두 사형이라는 '제도로서 살인'에 반대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세계관은 전혀 다르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은 성경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음에도, 율법적 가치를 초월한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며 두 개의 살인이 다르지 않음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저지른 범죄행위로서 살인과 국가적 차원의 공적 장치가 행한 그것이 다르지 않음을 주장한다. 반면에 데드 맨 워킹은 기독교적 보편가치 안에서 구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법을 수호하기 위해 국가가 행하는 살인조차도, 절대적 가치로서 구원을 능가할 수 없기에 그 의미가 퇴색한다는 논리에 귀결케 한다.

예수의 마지막, 같이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그를 비방하고 조롱했지만, 다른 하나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죽음이 임박하기 직전에 행해지는 회개는 진솔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은 구원을 허락한다. 이로써 기독교적 율법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제도로서 사형에 대해 회의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두 영화 모두 사형제도에 대해 반대한다는 관점을 분명히 하지만, 키에슬로프스키가 살인에 관한 적나라한 묘사를 통해, 율법보다 앞선 근본적인 질문으로 국가적 차원의 살인을 비판하고 있다면, 로빈스는 인물 간의 정서적 혼돈 속에, 성경의 롤 모델을 원용하여 배치함으로써 종교적 구원 앞에 국가가 행한 살인의 부질없음을 일갈한다. 전자가 리버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 후자는 회개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보수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범위 내에서 사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요즘 새삼스럽게 사형제도에 관한 언급이 활발하다. 대한민국은 사형제도가 존속하는 국가다. 하지만 1997년 이후 사형은 더 이상 집행하지 않고 있다. 필자는 사형 반대론자이다. 최근 들어 내적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기존의 신념을 꺾고 싶지 않다. 그러나 어쩌면 어떤 특정한 범죄에 대해선 국가적 차원에서 사형이 선고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집행은 유보했으면 한다. 다만 또다시 사면은 No!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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