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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역사적으로 가장 낡은 北의 대남전략에 당하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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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3. 08. 02. 17:00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전쟁에서 승전의 가장 좋은 군사전략은 무엇일까? 이것은 인류역사에서 거의 모든 정치철학자나 전략가, 그리고 통치자들이 항상 스스로 묻고 또 타인에게 자문을 구했던 과제이다. 그렇다면 그 해답을 맨 먼저 구할 곳은 서양의 모든 철학의 출발점인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자들의 작품들 속에서 성공적 전쟁수행을 위한 전략에 관한 어떤 진지한 논의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나 크세노폰(Xenophon)의 역사서를 주의 깊게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이 역사서들은 전통적인 철학적 교과서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훈계적(didactic) 방식으로 작성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전쟁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 군사전략에 관하여 어떤 종류의 교리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지성사에서는 고대 중국에서처럼 손자의 <병법>과 같은 전략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양에서 체계적인 전략이론은 18~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의 경험 이후에 나온다. 이 말은 그 이전에 전쟁의 전략서적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사실, 찾아보면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동양의 손자와 같이 확고한 전략의 교과서로 인정되고 자리 잡은 서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3번의 걸친 연이은 전쟁의 승리로 독일통일에 기여한 프러시아의 몰트케(Moltke) 장군의 고백으로 유명하게 된 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의 <전쟁론>(Vom Kriege)이 클라우제비츠를 서양문명이 낳은 최고의 군사전략가, 혹은 유일한 '전쟁철학자'로 만들었다. 마오쩌둥도 생전에 클라우제비츠를 높게 칭송했었다. 그의 혁명전쟁 전략이 손자병법이 아니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제6권에서 나온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런 마오쩌둥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의 전략에는 적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적국의 내란을 조성하라는 원칙은 없다. 왜냐하면 근대국가를 전제로 한 그의 직접접근법에서는 그런 원칙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양상을 다룰 법을 제안한 플라톤의 <법률>에 전쟁을 다루는 법이 없다. 자기의 <정치학>에서 최선의 정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도 그런 문제에 관한 언급이 없다. 소크라테스도 <공화정>에서 수호자들의 교육을 다룰 때 그는 전쟁수행에 관해서 논하지 않았다. 다만 <공화정>에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 아데이만투스(Adeimantus)가 국가의 실질적 외교정책에 관해 물었을 때 전쟁에서 승리로 가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적국의 한 파당과 제휴하여 다른 파당을 굴복시키도록 내란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당시에도 신화적인 호메루스(Homerus)의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동맹국이 사용한 트로이 목마(the Trojan Horse) 전략의 원용에 지나지 않았다. 상대국의 내란조성 전략은 손자병법에도 중요한 전략들 중 하나였다. 이러한 소크라테스, 즉 플라톤이나 손자병법의 이런 아주 낡은 전략은 오늘날 근대 민족국가들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는 전략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반도는 아직도 하나의 단일 민족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분단된 곳이다. 따라서 남북한은 민족통일이라는 숭고한 위장된 슬로건을 내세워 남북한은 서로 간 상대방에게 내전을 조성하기 좋은 조건에 놓여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북한은 한반도에 남북한의 두 개의 사실상의 국가가 수립된 이후 줄기차게 이 낡은 전략을 남한에 실천해 왔다. 반면에 남한의 민주국가는 전체주의 북한에 그런 전략을 구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50년 6·25전쟁을 일으킬 때도 북한은 남한의 남로당 주도의 10만명에 달하는 남한의 친북 인민 봉기세력을 가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탈린의 명령으로 소련군 장교들이 남침전략을 수립할 때 남한의 서울만 북한군이 점령한다면 남한을 정복할 것으로 확신하고 서울의 점령계획까지만 수립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남한의 인민봉기로 승리를 완성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남한의 인민봉기가 일어나지 않자 북한의 김일성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손엔 서울 점령 이후의 군사작전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될 때까지 그는 밀리고 밀리다 국경선을 넘어 중국 땅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 전쟁의 최고지휘권마저 사실상 상실한 허수아비가 된 채 모든 것은 힘의 중심부인 스탈린과 그의 하수인 마오쩌둥에 달려 있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으로 7월에 휴전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김일성의 대남전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고대 동양의 손자와 서양 근대의 클라우제비츠가 공유하는 군사전략의 원칙들 중 하나는 "적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적의 동맹을 분열시키라"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서 북한은 대남 내전공작을 변함없이 추진하면서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체제의 파괴를 끊임없이 모색했다. 이를 위해 북한은 휴전협정을 종전협정으로 바꾸고 나아가 평화협정을 확보해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체제, 그리고 유엔사의 불필요성을 내세워 그들을 축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이 뿐만 아니라 북한의 폭군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 전제정권은 남북대결에서 북한의 승리를 위한 핵무기를 거듭 과시하여 남한의 종북세력에게 북한이 결코 망하지 않고 남북대결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줌으로써 남한에서 그들이 흔들림 없이 종북세력을 확장하고 동시에 그들의 충성을 심화해 왔다. 남한의 종북 혁명세력은 공산혁명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헤게모니 이론을 채택하여 남한에 혁명진지를 구축하기 위한 조직적인 투쟁을 벌여왔으며 그들은 실제로 상당히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람시의 혁명전략이 그 정도로 성공하는 것은 그들이 대한민국의 방만한 민주주의 제도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북세력은 남한에서 종북 정권을 세우고 북한과 종전협정을 추진해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순간 마치 1938년 오스트리아 나치정권이 독일의 히틀러 군대를 초대했던 것처럼 '민족통일'이라는 미명하에 북한군을 초청하여 총 한 방 쏘지 않고 남한을 점령하려고 한다. 이런 여건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 김정은 정권은 그 대안으로 1975년 베트남에서처럼 남한의 종북정권이 남한의 전군에게 무기를 내려놓도록 명령하고 북한군의 일방적 군사작전으로 남한을 점령하려 들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남한에서 종북정권이 수립되어 남한이 내전상태에 빠지는 것이 북한에겐 가장 유리한 조건이 될 것이다.

어쨌든 북한의 모든 대남정책은 철저히 군사전략적이다. 종북세력은 정치투쟁이 아니라 사실상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남한정부도 경찰력이 아니라 군사작전으로 수많은 '종북목마'들을 깔끔하게 소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6·25 이후 한강의 기적을 통해 선진국을 이룬 세계사에 빛나는 대한민국에 참담한 민족사적 자멸이라는 비극이, 그리고 세계사적으로는 하나의 상상하지 못할 코미디가 발생하고 말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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