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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작은 대한민국, 포르투갈 정착 한인 1호 원종성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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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 리스본 통신원

승인 : 2020. 11. 29. 11:13

1972년 포르투갈에 정착한 최초의 한인
현재는 200명대의 한국인 거주.. 유럽 재외동포의 0.04%
40년간 한국식 조청으로 과일잼 생산, 유럽 14개국 수출
제14회 한인의 날 기념 국민훈장 석류장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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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년간 한국인 관광객이 급격하게 늘어난 포르투갈 포르투의 도우루 강변./사진=김미경 리스본 통신원
대항해시대, 포트와인, 에그타르트(Pastel de nata) 하면 떠오르는 나라, 포르투갈. 포르투갈의 매력이 대중매체를 통해 한국에 입소문을 타게 된 건 최근 2~3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 가까운 유럽 국가에 비해 늦게 주목을 받았고 유럽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했음에도 불구, 작년 한 해에만 2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포르투갈을 방문했다. 여행에 그치지 않고 정착하고 싶은 투자 이민국가로도 떠오르는 중이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여행지로서 알려진 것에 반해 이민으로서는 알려진 바가 많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포르투갈의 한인은 현재 약 200여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여 명의 포르투갈 한인 중 절반가량이 유학생이므로 완전히 정착한 한인은 훨씬 적은 셈이다.

외교부에서 2019년에 발표한 재외 동포 현황에 따르면 전 세계 한인 재외 동포의 9%에 해당하는 약 68만 명이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을 포함한 유럽 지역에 살고 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한인은 그중 0.04%에 불과하다. 바로 옆 나라 스페인은 5천 명이고 프랑스는 2만 9천 명, 독일은 4만 4천 명인 것과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이렇게나 한인이 드문 포르투갈이지만 약 반세기 가량 오롯이 한인 사회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포르투갈의 정착 한인 1호 원종성씨다. 그는 1972년 포르투갈에 정착한 최초의 한국인이자, 한국식 조청 기술로 잼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님이며, 포르투갈인 부인과 3명의 자녀, 4명의 손자녀를 둔 한 집안의 어르신이기도 하다.

이런 원종성씨에게 11월 26일(현지시간) 주 포르투갈 한국 대사관저에서 제14회 한인의 날 기념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여하는 전수식이 이뤄졌다. 해당 국민훈장은 동포사회의 권익신장 및 발전에 공헌한 재외 동포 유공자에 포상된다.

석류장을 받은 원종성씨는 가장 먼저 현지에 정착, 대한민국에 대한 인지도도 낮았던 포르투갈에서 △동포사회의 교류 및 결속력 강화를 위해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헌신 △현지 사회와 지속적인 교류로 포르투갈과 한인사회의 교량 역할 △40년 넘게 식품회사를 운영하며 양국의 경제교류 및 친선관계 증진에 이바지 등의 공로가 인정되었다.

오송 주 포르투갈 대한민국 대사는 원종성씨가 포르투갈 한인 동포사회의 토대를 마련하고 포르투갈 내 한국의 우호적인 정서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고 전수식에서 그의 공로를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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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6일(현지시간) 주 포르투갈 한국 대사관저에서 이뤄진 한인의 날 국민훈장 전수식. 왼쪽: 원종성 국민훈장 석류장 포상자, 오른쪽: 오송 주 포르투갈 대한민국 대사./사진=김미경 리스본 통신원
원종성씨가 포르투갈에 도착한 건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인 1972년이다. 그 유명한 1974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보다 2년 앞선 해다. 당시 한국에는 포르투갈 대사관도 포르투갈에 대한 정보도 없었지만 23살의 종성씨는 돈을 벌겠다는 일념 하나로 과감히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렇게 수도 리스본에서 차로 3시간 떨어진 산골짜기 마을, 카라물루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병아리 감별은 1920년대 일본에서 개발된 기술로서 부화한 지 24시간 안에 병아리의 암수를 구별해야 하는 일이다. 세심한 손기술과 고도의 집중력, 백열등에 강한 검은 눈동자를 가진 전문 기술자가 필요하다 보니 특히 한국과 일본의 병아리 감별사는 유럽에서 높은 급여와 우대를 받았다.

하지만 궂은 날씨와 감기몸살에도 매일 새벽 4시부터 하루 종일 수만 마리의 병아리를 감별해야 했는데 이런 노동보다 힘든 건 외로움과 그리움이었다고 원종성씨는 말했다. 당시 포르투갈 전체에서 한인은 카라물루 공장의 원종성씨와 동료가 전부였다. 낯선 타지에서 서로를 의지했지만 종성 씨보다 먼저 온 한국인 근로자도, 나중에 온 근로자도 모두가 1년 가량 짧게 머물다가 다른 유럽 국가로 옮겨갔다.

단 하나뿐인 정 든 한국인 동료와의 이별, 고국에 대한 향수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등. 70년대 포르투갈의 생활은 20대의 종성 씨에게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교성 좋고 밝은 성격 덕에 언어는 서툴러도 현지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포르투갈을 떠나지 않는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의미에서 동료들 사이에서 Won 종성이 아닌 One 종성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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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 원종성씨와 부인 오르텐스 여사, 장녀 필리파./사진=김미경 리스본 통신원
몇 년 후 포르투갈인 부인과 만나 결혼하고 같은 해 첫 딸까지 태어나면서 원종성씨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했다. 동시에 포르투갈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바로 유전자 법의 개발로 포르투갈에서 더 이상 병아리 감별사가 필요하지 않게 된 것. 급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종성 씨는 시대의 흐름에 주목했다. 당시 70년대는 유럽에서 웰빙식품과 일본 제품에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였는데, 일본 오사카, 오키나와에서 열린 엑스포로 일본 제품이 유럽에 수입되기 시작했고 그중 일본 된장과 조청도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에서 일본 조청은 쌀로 만든 꿀 (Mel de arroz)이라 불리며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조청은 예로부터 떡이나 한과에 이용되는 전통 감미료로서 한국인 원종성씨에겐 자신 있는 분야였다.

여기에 착안하여 고생 끝에 H.WON 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한국식 옥수수 조청 사업을 시작했다. 더 나아가 조청을 이용해서 과일 잼을 만드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는데 이는 당시 설탕을 이용하여 잼을 만드는 유럽식과 차별화된 방식이었다.

자연식 제품을 선호하는 시대의 흐름, 유럽 현지인들의 일상 식품인 잼, 동양의 낯선 나라 한국의 이국적인 매력, 그리고 원종성씨의 뚝심으로 마침내 포르투갈 정부의 품질 인정을 받고 H.WON의 상품은 80년 도에 유럽 14개국으로 수출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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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유기농 식품 전문 판매점 Celeiro에 진열된 H.WON의 자두잼./사진=김미경 리스본 통신원
포르투갈에 더 이상 한국인 병아리 감별사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다른 목적으로 한국인이 입국하기 시작했다. 태권도 사범과 기업의 주재원 가족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 그렇게 80년 초에 원종성씨와 태권도 사범, 3명의 주재원 가족들, 총 5명으로 이루어진 포르투갈 최초 한인회가 창설된다. 그 후 90년대에서 2000년대에는 포르투갈에 한국 기업이 많이 들어오면서 한국인이 350명 가량까지 늘어났지만 지금은 기업 이전과 주재원 수 감소로 총 200여 명의 한인이 있다. 다른 국가의 한인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지만 원종성씨에겐 소중한 대가족이다. 또한 포르투갈에 처음 정착하는 한인들에게 원종성씨는 든든한 삼촌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정현주 한인회장은 말했다.

80년대부터 원종성씨의 사업은 안정되었고, 세 자녀들은 특별한 지원 없이도 학사 혹은 박사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자란 자녀들이 안정된 직장을 구하고 결혼해서 이제는 사랑스러운 4명의 손녀들까지 생겼다. 또한 원종성씨 부부는 포르투갈의 연금제도 덕에 더 이상 회사에서 급여를 받지 않아도 노후 걱정 없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원종성씨는 지금은 완전히 포르투갈 현지에서 정착했지만 마음 한 편에 자리한 고국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은 평생 지울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유럽에서 0.04%에 지나지 않은 작은 한국 사회이지만 포르투갈에서는 한국에 대한 인지도와 친근감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더불어 리스본과 포르투에서는 한식당, 디저트 카페 등 젊은 한국인 사장님들의 도전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그리고 앞으로 포르투갈에서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한국인들에게 원종성씨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한다. “포르투갈에 이런 말이 있다. ‘Devagar se vai ao longe (천천히 가는 게 더 멀리 간다)’ 처음부터 큰 성공을 바라며 서두르지 말고 조금씩 천천히 다지며 발전해 나가자. 그러다 보면 나중에 꼭 본인 만의 알찬 성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김미경 리스본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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