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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슈퍼카의 성지다. 페라리·람보르기니·파가니 등 잘 알려진 브랜드부터 텍니카·줄리아니·마잔티와 같은 수제작 브랜드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무게배분이 월등하게 뛰어난 MR구조(미드십 엔진, 후륜구동)를 뼈대로 사용해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디자인을 추구한다. 긴 프런트 오버행에 비해 극단적으로 짧은 리어 오버행이 비례를 결정한다.
운전석 풋레스트에 가까운 프런트 휠과 시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리어 휠은 캐빈을 제외하곤 실용적 공간을 극단적으로 제한한다. 이런 결과로 생성된 공격성은 낮고 넓은 쐐기형 혹은 유선형 차체에 담겨진다. 이것이 퍼포먼스를 최고로 여기는 슈퍼카 디자인의 덕목이고 독특한 슈퍼카 디자인 트렌드를 주도하는 이탈리안 감각이다.
페라리는 여기에 여유를 더한다. 전통적인 FR구조(프런트 엔진, 후륜구동)를 적극 활용해서 슈퍼카 스타일의 GT(Grand Turismo) 세그먼트를 유지한다. 경쟁자인 람보르기니는 도전하지 않는 시장이다. 실용적인 디자인에 뛰어난 성능까지 겸비한 가성비 높은 독일 브랜드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모기업인 폴크스바겐 그룹은 FR구조 람보르니기를 개발해 좁은 시장에서 카니벌라이제이션을 일으킬 이유도 없다. 같은 국적의 피아트 산하 페라리는 상황이 다르다. 전통적인 FR구조 2+2시트 GT카의 명맥을 피아트의 지원 아래 현재까지도 이어간다.
GTC4 루쏘 이름을 통해본 페라리 2+2 GT카 디자인 언어
페라리의 2+2시트 디자인의 역사는 1953년 그들의 엠블럼을 달고 로드고잉으로 대량 양산된 250 GT 모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50 GT는 이탈리안 스타일의 정수로 통하는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가 디자인을 맡았다. 핸드 스탬핑의 연금술사인 스칼리에티가 보디를 완성해 페라리를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협업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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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네타(Berlinetta)는 이탈리아어로 쿠페 스타일을 뜻하는 동시에 ‘little saloon’란 의미도 지닌다. 즉, 작은 세단을 가리키는 베를리네타는 2+2시트 쿠페 스타일을 일컫는다. 250 GT 베를리네타 루쏘 역시 250 GT 베를리네타의 에디션 모델이다. 한 단어 차이지만 두 330 GTC는 페라리 모델 중 GTC라는 이름을 처음 썼다. 디자인의 차이는 크다. 디자인 비교를 통해 루쏘의 의미를 먼저 되짚어 봐야 GTC4 루쏘 디자인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1962년 파리 모터쇼를 통해 등장한 250 GT 베를리네타 루쏘는 베이스 모델인 250 GT 베를리네타의 ‘Civilized Design’ 버전이다. ‘Civilized’는 문명화된, 개화된, 고상한, 교양 있는 등의 뜻을 지니는데 한 단어로 한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의상디자인 용어인 ‘포멀(Formal)’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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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와 맞닿는 B필러를 수직으로 자른 채 내버려둔 거친 표현은 레이싱카답다. 라디에이터 그릴을 가로지르는 스틸 범퍼는 단절시키거나 없애 에어 인테이크의 먹성을 강조한다. 더불어 에어 브리더(Air breather)를 측면에 추가해 고성능을 암시한다. 반면 루쏘는 우아한 루프라인을 따라 쿼터 글라스와 리어 글라스가 C필러를 감싼다. 그린하우스의 채광성을 높이면서도 지극
히 도회적이다.
길어진 오버행은 차체를 더욱 늘씬하게 하고 트렁크 용량을 키워 실용성을 높인다. 이는 2+2시트를 갖춘 패키징에서 뒷좌석의 승객을 배려하는 디자인이다. 점차 생산량을 늘려가던 페라리에게 있어 포용력 있는 디자인은 중요했다. 말끔한 슈트를 입은 신사와 같은 루쏘 스타일의 250 GT 베를리네타는 1960년대 공격적인 스타일의 스포츠카 이외에, 다양한 T.P.O에 맞는 디자인을 원하는 소비자의 니즈를 반영한 ‘Civilized Desig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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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으로서 4시트 슈팅브레이크 FF가 페라리 혈통의 준마로 다시 태어나다
2012년에 등장한 페라리 FF의 프로포션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당시 자동차 브랜드에서 스포츠 세단, 혹은 4도어 쿠페의 열풍은 대단했다. 애스톤 마틴 라피드와 포르셰 파나메라가 그랬다. 페라리도 합류했다. 2+2시트를 가진 모델은 F12 베를리네타에게 위임하고, 독립된 4시트를 가진 모델로 FF를 들고 나왔다. FF가 채용한 스타일은 살룬이 아니고 슈팅 브레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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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영국에서 고성능 2도어 왜건을 일컬어 슈팅 브레이크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슈팅 브레이크를 페라리에서 자사의 V12 고성능 플래그십 디자인을 위해 부활시켰다. 여러모로 FF는 그 형태와 이름만으로도 파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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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마지막 Civilized Design 혈통이라 할 612 스칼리에티와 같은 트윈 서클 리어 램프로의 회귀다. 싱글 서클 리어 램프는 장난끼스러운 악동적 캐릭터가 중심이 된 디자인 언어에 방점을 찍는 요소다. 트윈 서클 리어 램프는 그에 반해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모습을 표출한다. 더군다나 트렁크 리드에 엣지를 주어 패널과 램프의 입체감을 극대화시키는 디테일은 트렌디하다. 넓은 수평적 라인으로 잡힌 각은 흡사 슈트의 라펠(Lapel)과 같이 포멀함에서 오는 중후한 느낌마저 든다. 장난끼는 사라졌고 V12스러운 품격이 느껴진다. 파격은 없지만 보편 타당한 이해가 들어갔다. 이것이 Civilized Design이자 루쏘라는 단어의 해석이다.
측면으로 눈을 돌려보자. 보디의 스타일을 위해 엣지를 사용했다. 페라리는 엣지를 장식으로 사용한 적이 드물다. 에어 플로우를 관장하는 덕트와 인테이크의 형상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혹은 458 이탈리아나 FF에서 보여주듯이 매우 소극적인 형태로 옅게 드리운다. 612 스카리에티만 스탬핑 장인의 가치를 기리기 위해 캐릭터 라인과 웨이스트 라인이 연결된 엣지를 넣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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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엣지의 활용은 피닌파리나의 영향력에 놓였던 페라리 스타일이 아니다. 순수하고 풍부한 볼륨으로 치장한 면들은 강한 엣지와 직선으로 분할된다. 트렌디하고 세련됐다. 이는 인테리어 디자인에서도 공감할 수 있다. 피아트 그룹 럭셔리 브랜드 특유의 질감이 두터운 가죽 느낌이 사라졌다. 센터페시아에 위치한 10.25인치 HD 인포테인먼트 스크린은 얇게 저민 가죽으로 둘러싼 에어 벤틸레이터에 걸쳐있다. 뛰어나게 감각적이고 트렌드를 앞서가는 디자인이이다.
페라리의 미래를 보여주는 콘셉트카를 뛰어넘는 모델
GTC4 루쏘는 그 옛날 250 GT 베를리네타 루쏘에 Civilized Design 콘셉트를 반영해 소비자의 니즈(시대가 요구하는 흐름)와 트렌드를 디자인에 반영한 공식의 부활이다. 스포츠카 브랜드에서 외형 디자인을 슈팅브레이크 형태로 선택했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빠른 단종을 예고할 수도 있었지만 페라리의 선택은 달랐다. 실용성에 실용성을 더했고 이제는 정체성과 명맥을 포갰다.
GTC4 루쏘는 주장한다. 모델명이 바뀐 이유를 디자인이 근거를 댄다. 디자인이 변화된 이유는 모델명이 증명한다. 타당성 있는 논리로 포장된 디자인은 시대를 막론하고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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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에서는 또 어떠한가? 선 하나, 디테일 하나와 같은 작은 변화들을 효율적으로 조율해서 이질적이지 않게 큰 변화를 이끌어낸 이탈리아식 마이더스 연금술이다. 놀랄 만한 멋진 모델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