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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서거] 대한민국 ‘민주화의 큰 산’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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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범 기자

승인 : 2015. 11. 22. 20:33

김영삼 전 대통령, 패혈증·급성심부전으로 정치생 마감
'국가장' 26일까지 5일장, 26일 국회서 영결식 거행
최연소·최다선 국회의원, 민주화 투쟁의 기폭제 역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고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한국 정치사의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파란만장한 정치생을 마감하고 영면의 길에 들어섰다.

민주화 투쟁을 이끈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지 6년여만이다. 이제 영호남을 대표하며 반세기 넘게 질곡의 한국 현대 정치사를 이끌어왔던 ‘양김(兩金) 시대’도 역사 속으로 완전히 저물게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은 긴급 브리핑에서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정오께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했으며 상태가 악화돼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돼 사망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올해 88세로, 고령인 데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으며 그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다. 특히 2008년 뇌졸중 진단을 받은 뒤 2013년 4월부터 18개월 동안 반신불수를 동반한 중증 뇌졸중으로 장기 입원치료를 받았다.

서거 당시 김 전 대통령 옆에는 차남 현철씨 등 가족이 자리해 임종을 지켰으나 부인 손명순 여사는 상도독 자택에 머물며 마지막 길을 함께하지 못했다. 유족으로는 손 여사와 딸 혜영(63)·혜정(61)·혜숙(54)씨, 아들 은철(59)·현철(56) 씨 등 2남 3녀가 있다.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참석차 말레이시아를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는 관련법과 유족들의 뜻을 살펴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다. 유가족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다.

정부는 이날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국가장법에 따라 장례위원회가 설치되며 위원장은 관례대로 황교안 국무총리가 맡는다. 장례 기간은 26일까지 5일장으로 정해졌으며 영결식은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다. 안장식은 영결식 종료 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된다.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金洪祚)씨와 어머니 박부연(朴富蓮)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만 27세의 나이로 최연소 당선된 뒤 제5·6·7·8·9·10·13·14대 국회의원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의원직에서 제명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들어서는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 정치적 박해 속에서도 23일간의 단식 투쟁과 ‘87년 6월 항쟁’ 등을 주도해 군사정권 기반 약화와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는 민주화 투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92년 대선에서 당선돼 30여년간 이어져온 군정의 종식을 이뤄내며 본격적인 ‘문민시대’를 연 김 전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시행,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 청산, 군·정보기관 비리 특별감사, 일제잔재 척결, 지방자치제 시행 등 과감한 개혁을 벌였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2월 퇴임한 뒤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줄곧 지냈다. 비록 ‘IMF 대통령’이라는 족쇄가 있었지만 ‘민주화의 대부’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정치적 제자였던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여전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이후로도 상당히 이어졌다.
최태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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