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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발주자는 불공정해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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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12. 11. 01. 15:03

최민수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건설정책연구실장
흔히 원하도급 관계에서 원도급자가 저가 하도급을 유도하거나 심지어 부당한 특약을 요구했다면, 원도급자는 상당한 도덕적 비판을 받게 된다. 

거래상 지위를 활용하여 불공정거래를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원하도급 관계와 마찬가지로 발주자와 시공자 사이에도 수직적 관계의 폐해와 불공정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공공공사 입찰에서 발주자가 시공자에게 적자(赤字) 수주를 유도했다면, 도덕적 비판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우수한 발주자로 인정되어 표창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역으로 시공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실행원가도 모른 채 적자로 수주했는가에 대해 비판이 쏟아진다. 

또, 덤핑 경쟁이나 적자 수주는 입찰자들의 문제이며, 발주자가 책임질 사항이 아니라는 시각도 지배적이다. 

그러나 원하도급 관계에서 하도급 금액을 부당하게 삭감했거나 저가 하도급을 유발한 원도급자를 불공정하다고 볼 수 있다면, 공공공사 입찰에서 적자 수주를 방치했거나 과도한 덤핑 경쟁을 유도한 발주자도 역시 불공정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공공공사 입찰을 보면, 발주자가 작성한 예정가격을 신뢰하고 입찰에 참여하는 사례가 많다. 

그러므로 만약 발주자가 자신의 예산에 맞추어 공사설계가격을 인위적으로 삭감해 예정가격을 작성한다면, 적자 수주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발주자 입장을 보면, 입찰자는 예정가격의 적정성을 검토한 후 투찰할 의무가 있으며, 적자 수주는 전적으로 입찰자의 책임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적자 수주가 충분히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예정가격을 고의로 삭감했다면 이는 청과물 시장에서 부패한 과일을 일단 판매한 후, 그에 대한 책임을 모두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행위와 다를게 없다. 

물론 과일이 부패했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한 소비자에게 1차적인 잘못이 있으나, 썩은 과일임을 알고도 이를 판매했다면, 판매자도 과히 공정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동안 건설정책의 흐름을 보면, 원하도급 관계의 불공정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양한 대책이 강구되어 왔다.

예를 들어 하도급 금액이 원도급 금액의 82% 미만일 경우, 가격 적정성을 심사할 수 있다. 하도급 협력 관계를 평가하여 공공공사 입찰시 불이익을 부여하기도 한다. 

반면, 발주자의 불공정 행위에 대해서는 제도적 대책이 미흡했다. 앞으로 발주자가 고의적으로 적자 수주를 강제했다면, 그로 인한 낙찰자의 피해를 구제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덤핑 투찰을 방지하기 위해 저가(低價) 심사가 제대로 기능해야 한다. 

시공 과정에서도 발주자와 시공자간 불공정 행위 사례는 매우 많다. 일례로 토지 보상 업무가 완료되지 않은 채 공사가 발주되고, 공사 시행 과정에서 시공자가 토지보상업무에 동원되는 관행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보상과 관련되어 공기 지연, 공사 중단, 민원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보상 업무는 본질적으로 발주자에게 책임이 있으며, 보상 업무가 일정 수준 진행된 이후에 공사 착공을 의무화해야 한다. 

민간투자 사업도 토지를 먼저 보상하는 선(先)보상 후(後)시공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또, 발주자 귀책이나 불가항력에 의하여 공사기간이 연장될 경우에는 이에 대한 간접비용의 보상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비합리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하자담보책임기간도 재정립이 요구되며, 시공자에게 불리하게 규정되어 있는 '공사계약일반조건' 등도 재검토가 요구된다. 

추가공사(additional work)와 계약사항이 아닌 새로운 공사(extra work)에 대한 구분도 명확히 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상생'이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다. 건설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정부에서는 '공생발전위원회' 등을 구성해 다양한 의견 수렴과 제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법적 분쟁이나 클레임이 미약하다는 것은 아직까지 발주자와 시공자간 수직적 관계의 벽이 높다는 점을 대변하고 있다. 앞으로 원하도급 뿐만 아니라 발주자와 시공자 사이에도 수평적 관계가 정립되고, 상생의 원칙이 기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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