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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진화를 언급한 이 책이 불러일으킨 엄청난 소동을 목격하였고 자신의 견해가 ‘악마의 사도’나 가질법한 위험한 발상임을 알고 있었기에 동료학자들에게 발설하는 것 까지도 두려워하였다. 다윈은 1856년 친구인 후커에게 쓴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자연의 굼뜨고 헤프고 서툴고 미개하고 무시무시하게 잔혹한 활동들을 책으로 쓴다면 ‘악마의 사도’라는 제목에 딱 맞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이론을 숨기고 20년 이상 더 철저하게 증거를 모으고 또 자신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명성을 쌓으며 협력자를 확보하기위하여 학계의 거물들과의 교류를 계속하였다.
다윈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이 주도했던 루나 학회(Lunar Society)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미치광이’(lunatic)이로 자처한 이 학회의 회원들은 제임스 와트, 메튜 볼턴, 조시아 웨지우드, 윌리엄 머독, 리처드 에지워스, 조셉 프리스틀리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역사적 업적을 남긴,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핵심 과학자, 발명가, 사업가들이다. 이들은 주류에서 다소 소외된 ‘비 국교 학술계’를 이끌던 실용적 발명가, 사업가 군이었다. 그들은 정규대학에 입학할 수 없는 처지였으나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였고 전통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활발한 연구는 19세기 영국의 영광을 위한 씨앗이 되었다고 사가들은 평가한다. ‘산소의 발견자’로 알려진 조셉 프레스틀리는 유니테리언 목사였다. 뛰어난 실험가이자 과학자였던 프리스틀리는 <통치의 제1원리에 관한 고찰>,(1768년)이라는 대담한 혁신적 견해를 발표 했던 정치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루나 학회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루나회원들의 불온한 사상적 경향을 의심하던 왕당파와 성공회는 1791년 “바스티유 함락을 찬양하는” 만찬을 준비한다는 구실로 대중을 사주하여 버밍엄에 있던 그의 집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그는 고령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고 그곳에서 벤자민 프랭클린등과의 깊은 친분을 바탕으로 미국 건국에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된다. 프리스틀리의 이민으로 루나학회는 해체되었다. 전통지주계급과 대립적인 정치적 견해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루나학회의 회원들은 프랑스 대혁명의 대의에 공감한고 있다고 간주되어 대중과 귀족계급에게 공격의 대상이었다. 다윈집안의 전통과 그가 속한 계급의 처지를 이해하는데 루나학회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은 루나학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또한 그는 1794년 <동물 생리학>을 출간하고 ‘진화론’을 펼쳐 보였다. 다윈의 할아버지는 ‘신이 진화라는 거대한 시계의 태엽을 감았고 이를 작동시켰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1802년 윌리엄 페일리는 <자연신학>이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 그는 시계가 시계공의 존재를 함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도록 정교하게 디자인 된 생명체로 가득한 이 세계는 ‘신의 설계’를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과학자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페일리의 주요저작은 당시 신학대학의 주요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고 다윈 역시 페일리의 애독자이자 추종자였다. 그들에게 모든 것이 신의 작품이라면 생명체의 교묘한 디자인을 공부하는 것은 곧 신의 창조적 재능을 연구하는 것과 같았다. 다윈은 ‘진화론’을 발명한 것이 아니고 ‘진화론’에 최종적인 해답을 제시했다. 다만 ‘생명체’의 설계자를 신이 아닌 ‘자연선택’에게 부여했을 뿐이다. 다윈은 성공적인 가문의 부와 할아버지의 자유사상과 자연학적 전통을 상속받았던 것이다. 루나학회는 다윈의 기질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학회 회원인 조시아 웨지우드 가문과는 겹사돈으로 얽혀있었고 다윈 자신도 외삼촌의 셋째 딸인 웨지우드 에마와 결혼하였다.
에라스무스 다윈과 윌리엄 페일리의 ‘신의 설계’ 관념에서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의 관념으로 나아가는데 라마르크라는 징검다리가 존재했다. 라마르크는 지구의 나이가 당시의 짐작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며, 생명체의 형태도 오랜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했다고 확신했다. 라마르크의 진화에 대한 결론은 요약하면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자연이 복합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둘째, 그는 생물기관이 사용할수록 강해지고 강화되며 이 획득형질이 후대에 전해진다고 믿었다. 첫째는 생명체가 끊임없이 진보했고, 인간이 이러한 진보의 최종산물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둘째는 사용과 불용의 원리를 통하여 평생 개선된 형질이 유전된다는 것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의 첫 페이지의 대부분을 라마르크의 학설을 소개하는데 사용했다. 라마르크는 당대에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는 당시 가장 많이 인용되었던 곤충학자였다. 그는 종이 변화한다는 것과 이러한 변화에 설계자를 가정하지 않았다는데서 “신에게 불경한 자”라며 엄청난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다윈은 진화에 주관자이신 신도, 태엽을 감는 존재도, 생득적인 진보 경향도 없는 더디고도 우연한 변화만이 있을 뿐이라는 자신의 견해가 일으킬 비난에 대하여 짐작하고 두려워했다. 망설이던 다윈에게 윌리스라는 젊은 박물학자가 1858년 6월 18일 보낸 편지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자신과 거의 비슷한 이론을 독자적으로 구축한 이 젊은 학자에게 자신의 연구 성과가 선점당할 위기에 처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 후 다윈이 황급히 윌리스와 동시에 논문을 발표하고 <종의 기원>을 출간한 경위는 비교적 소상히 알려졌다. 다윈이 윌리스의 명예를 훔쳤다는 비난부터 비교적 공정하게 대처했다는 옹호론까지 다양하지만 진실은 다윈 자신만이 알 것이다.
다윈은 자연선택을 10단어로 요약하였다. “번식시키고, 변화시키고, 가장 강한 자는 살아남게 하고, 가장 약한 자는 죽게한다” (Multiply, vary, let the strongest live and let the weakest die) 그러나 <종의 기원>은 인류에 대하여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윈의 입장에서는 그의 이론이 충분히 암시하는 반성서적 내용들을 강조하여 대중의 분노를 증폭시켜 이익이 될 것이 없었다.
그는 <종의 기원>의 끝부분에 진화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인류의 기원과 역사에 대한 조망이 이루어지리라”며 암시적인 말을 남긴다. 다윈은 다음과 같은 말로 <종의 기원>의 내용을 끝마친다. “ 이리하여 자연계의 투쟁에서, 즉 기아와 사멸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대상, 즉 고등동물이 생겨나는 것이다. 생명은 처음에 창조주에 의해 소수의 또는 하나의 형태로, 여러 가지 능력과 함께 불어넣어졌다는 견해, 그리고 이 지구가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계속해서 돌고 있는 동안에, 그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매우 아름답고 놀라우며 무한한 형태로 수없이 생겨나고 또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는 견해에는 장엄함이 있다” 비록 창조주를 등장시켰지만 이 마지막 결론은 다윈의 탁월한 문장력과 그의 넘치는 자부심을 보여준다.
다윈은 인류에게서 ‘신’이라는 환상을 앗아갔다. 다윈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영원한 생명의 믿음을 주는 ‘신’이라는 두꺼운 담요를 벗겨버리고 황량하고 매서운 진리의 벌판으로 우리를 추방했다. 러시아계 미국인인 유전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진화과정은 우주의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자신을 의식함으로써 인류를 탄생시켰다” 다윈은 진화와 자연선택에 관한 ‘이해’라는 살을 에는 바람에 인간을 맞서게 함으로써 인류의 기원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능하게 했다.최정호 최정호성형외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