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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레이몽 아롱의 ‘지식인의 아편 (The Opium of Intellectuals)’ 출간 70주년을 맞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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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1. 1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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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이다. 이데올로기가 세속적 종교라면 특정된 이데올로기의 광신자는 일종의 '아편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르크시즘은 1917년 러시아의 혁명 이후 유라시아 대륙을 물들이는 분명히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편쟁이이다.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1955년에 '지식인의 아편'을 출간하여 그해 소르본(Sorbonne)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로 선출되어 대학교수로 돌아왔다. 그러나 3~4주 이전에 이 책의 출간을 이유로 소르본 교수 선출이 어렵게 되었지만 그의 젊은 시절 친구였던 소르본 대학교수들이 그를 설득력 있게 옹호해주어 다행스럽게 선출될 수 있었다. 당시에 그는 이미 저널리스트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충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일종의 사명의식에 부응하길 원했다. 부분적으로는 그의 선친의 열망이 대학교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그의 셋째 아들인 레이몽이 선친의 꿈을 대신 이루려는 염원도 있었다. 그는 다시 대학교수가 되어 책들, 중요한 책들을 쓰고 싶었다.

금년 2025년은 레이몽 아롱의 '지식인의 아편'이 출간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영어 번역판은 1957년). 냉전은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동서의 분열은 각 국가 내에서도 반복되었고 또 각 국가의 지성계를 분할했다. 이런 현상은 특히 프랑스에서 심했다. 프랑스에서는 그것이 심지어 우정마저 깨뜨렸다. 핵심적 문제는 외교적 및 지적 차원에서 소련에 대한 태도였다. 외교적으로는 소련이 유럽의 반을 장악한 상황에서 유럽의 균형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대서양 동맹이 외교적 균형에서 필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롱에게 많은 지식인들이 당시에 거의 자명한 명제를 수락하길 거부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인 좌파의 지식인들은 특히 프랑스의 지성계를 사실상 지배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레이몽 아롱은 용기 있게 '지식인의 아편'을 출간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으며,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그들을 동행하는 언론들에 의해서 적대적인 반응으로 도배가 되었다. 그 결과 레이몽 아롱은 좌파 지식인들의 대표적 공적이 되었다. 당시 유럽은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서, 유럽에서 출몰하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에 의해서,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의 저항할 수 없는 부상에 의해서 위협받았다. 진보주의자들과 대서양주의자들(Atlanticist) 간의 논쟁은 소련체제와 미국의 민주주의 간 각각의 덕목과 결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레이몽 아롱과 다른 한편으로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메를로-퐁티(Merleau-Ponty) 사이의 먼 거리를 노정하는 첫 놀라움은 1945년에 등장했다. 메를로-퐁티가 사르트르와 실존주의를 논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공산주의와의 불화는 가정불화로 취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곧 가정불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메를로-퐁티와 레이몽 아롱의 첫 논란은 1947년 메를로-퐁티의 에세이가 아롱을 경악케,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즉각적인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아더 케슬틀러(Arther Koestler)가 '정오의 어두움(Darkness at Noon)'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모스크바의 재판(Moscow trials)이 그 책에게는 중심, 목적 혹은 기회였다. 케스틀러의 모든 작품에서만큼이나 '모스크바 논쟁들의 속기록'에 실존주의가 있다는 말에 아롱은 분개했다. 희한하게 그 재판이 논쟁이라고 불리었다. 그 재판은 미리 날조되고, 역할이 정해졌으며 그리고 판사들과 피고들 모두가 사전에 작성된 '고백서들'을 암송했다는 것을 메를로-퐁티는 잊어버렸다. 왜 기소당한 자들이 고문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이 범하지 않은 죄악을 고백했을까? 메를리-퐁티는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지만 어쩌면 철학자로서 그는 이런 구체적인 요소들이 반대할 책임에 대해 그 '논쟁'으로부터 취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메를로-퐁티는 반공 선전을 거부했다. 그에게 폭력은 모든 편에 존재하며 진실이 거짓에 대립되는 것처럼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세계에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투쟁은 정도의 차이가 있고 또 모호한 것이지만 정도의 문제는 남는다. 만일 모든 외교정책이 기만과 폭력의 요소들을 내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한편에서, 히틀러와 스탈린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처칠과 루스벨트 사이에 아무런 도덕적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역사적 결정은 그 순간, 즉 그 결정이 이루어지는 맥락을 고려하여 판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메를로-폰티의 역사철학은 아롱에게 고전적이면서도 유치했다. 주의 깊게 고려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후에 다른 이론에 의해서 대치될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철학이 아니라 유일한 역사철학임을 내세운다.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역사적 이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단지 꿈이나 모험이 있을 뿐이다. 아롱에게 소련은 마르크스가 내다본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승리를 대변하지 않는다. 아롱과 메를로-폰티는 직접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사르트르는 시몬 드 보바르(Simone de Beauvoir)의 펜을 통해 그의 친구에게 대답했다. 장-폴 사르트르와의 친구관계는 1946년 정치적 이유로 깨졌다. 사르트르가 갈수록 공산주의의 동행자(fellow-traveler)가 되어가는 반면에 아롱은 소련체제와 많은 지식인들이 소련체제를 선호하거나 적어도 관용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가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주제를 발전시켰으며 좌익,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같은 신성시되는 말이나 신화에 관해서 그의 잘 주장된 비판, 즉 근대사회에서 지식인의 위상과 프랑스의 지성사에서 그들의 특이성에 관한 아롱의 자세한 분석과 비교는 그 책을 전후 프랑스와 유럽에서 등장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저작들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 책에서 아롱은 좌익의 이상을 공격하기보다는 그들의 왜곡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는 어떻게 고상한 이상들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 같은 고도로 재능 있는 인간들을 스스로 친-공산주의의 대변자가 되어 범하는 무지와 정신적 혼돈, 그리고 감정적 사고의 덕택으로 파괴적 신화가 되었는가를 분석했다.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책의 제목은 아롱이 수년 전에 사르트르와 벌인 논쟁의 과정에서 사용한 말에서 취했다. 이 책을 쓴 아롱의 목적은 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해서는 무자비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최악의 범죄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지식인들의 태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곧 좌익, 혁명, 그리고 프롤레타이아라는 신성시하는 단어들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세계의 정치적 신화였다. 이후 그는 역사의 숭배를 성찰하게 되었으며, 이어서 사회학자들이 아직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지식인들이라는 사회적 집단을 조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본서는 소위 좌익의 이데올로기의 현재 상태와 프랑스 및 전 세계 지식인들의 상황, 즉 지식인들의 소외를 다루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마땅히 자문했어야 할 몇 가지의 질문에 대답하려는 시도였다. 어찌하여 마르크스의 예측이 빗나간 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적 진화가 다시 유행하게 되었는가? 어찌하여 프롤레타리아와 공산당의 이데올로기들이 노동자 계급이 가장 작은 곳에서 더욱더 성공적일까? 어떤 환경 속에서 상이한 국가들에서 지식인들의 말하는 방식,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는가?

모두 3부로 구성된 본서의 제1부에서 아롱은 좌익, 혁명,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라는 세 가지의 정치적 신화들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했다. 그는 첫 번째 정치적 신화에서 '좌익'은 신화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프랑스에서 자신들을 좌파라고 생각하는 상이한 집단들이 결코 깊게 통일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위 좌익의 통일은 프랑스 정치현실의 성찰이 아니라 왜곡이었다. 그것은 '회고적 신화'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이 언제나 옳다는 공산주의자는 좌익에 속하는 사람인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모든 인민들의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폴란드인들과 동독인들의 자유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역사적 좌익의 언어가 오늘날 승리했지만 그러나 항구적 좌익의 정신은 분명히 죽어가고 있다고 아롱은 씁쓸하게 성찰했다.

아롱이 조사한 두 번째 정치적 신화는 혁명의 신화였다. 만일 계속적인 발전의 아이디어가 좌익의 신화 속에 암묵적이라면 혁명의 신화는 보완적임과 동시에 발전의 아이디어에 반대된다. 왜냐하면 혁명의 신화는 인간사의 정상적인 추세와 단절의 기대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적으로 혁명이란 한 정권이 다른 정권에 의해 갑작스럽고 난폭하게 대치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어떤 본질적 속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즉, 그것의 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소수에 의한 권력의 행사가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고 또 민족을 변화시키려는 꿈을 꾼다. 혁명적 권력은 하나의 폭정의 권력으로 정의된다. 폭력에 의한 권력의 장악과 행사는 협상과 타협이 실패한 갈등을 가정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민주적 절차의 실패이다. 혁명과 민주주의는 모순적 개념들이다. 소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은 과거의 모든 혁명들처럼 단지 한 엘리트에 의해 다른 엘리트의 폭력적 대치를 수반한다. 지식인들에게 개혁은 지루하고 혁명은 신나는 일이다. 전자는 산문적이고 후자는 시적이다. 혁명은 사건의 일상적 과정과 환영할 만한 단절을 제공하며 또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조성한다. 혁명의 신화는 이상주의적 지식인들의 피난처로 봉사했으며 현실과 이상 사이에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알선자가 되었다.

세 가지 정치적 신화들 중 마지막 세 번째 신화는 프롤레타리아의 신화이다. 마르크스의 종말론에서는 프롤레탈리아가 집단적 구세주의 역할로 정해진다고 아롱은 썼다.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는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에 의해서 소외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불만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소유의 형태와는 무관하다고 아롱은 대응했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이 국가에 속할 때에도 동일한 불만들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좌익, 혁명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는 한때 진보, 이성 그리고 인민이라는 정치적 낙관주의를 고무했던 위대한 신화들의 뒤 늦은 상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아롱은 결론지었다. 그런 개념들은 합리적이지 않고 또 지적 오류로 인해 신비하게 되었을 뿐이다. 공장의 거친 규율에 순종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그것이 사회의 본성을 바꾸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인만 바뀐다고 해서 그것의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위 '정치적 인간(homo politicus)'의 본질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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