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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대한민국의 대부(Godfather)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평범한 인간의 비범한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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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12. 0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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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전쟁은 난폭한 스승이다." 이것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자신의 역사서를 영원한 인류의 교훈서가 되길 기대하면서 원래 '영원한 재산(Eternal Possession)'이라는 제목을 붙인 그의 불멸 역사서 '펠로포네소스 전쟁사(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에서 했던 말이다. 전쟁은 본질적으로 폭력성을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인간본성에 입각한 인간 삶의 본질적 조건을 가르쳐 준다는 뜻이다. 실제로 인간은 난폭한 전쟁을 체험하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겠다. 바로 해리 S. 트루먼이 그런 인물이었다.

해리 트루먼은 20세기 유일하게 대학에 다니지 못한 아주아주 평범한 한 젊은이로서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경험을 통해 리더십의 소양을 개발하고 평생 역사와 미국 대통령들의 전기들을 꾸준히 읽는 자율학습을 통해 자신의 지적수준을 함양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미국의 제33대 대통령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1945년 4월 12일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우연히 대통령에 오른 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비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무조건 승리로 마무리하고 전후 세계질서를 수립한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었다.

해리 트루먼은 미국의 역사에서나 세계사에서 조지 워싱턴이나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위대한 영웅적 지도자는 아니었다. 해리 트루먼은 아주 평범한 사람, 혹은 평균적 인간으로서, 그 자신의 말처럼,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통령이 된 후 겨우 8개월 만에 자신의 고백처럼 우연히 대통령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주 평범한 인물인 그가 전임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그는 놀랍게도 비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전임자가 마무리하지 못한 제2차 세계대전을 무엇보다도 원자탄의 사용을 통해 빛나는 승리로 장식했으며, 또한 전후 세계질서를 관리할 것으로 기대된 유엔의 창설도 마무리했다.

그리고 전후 스탈린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응하여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유럽의 복구를 위해 마셜 플랜(the Marshall Plan)을 채택하고 소련을 봉쇄하는 정책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과 대한민국 국가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다. 트루먼은 또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재선의 승리를 이끌었고, 베를린 위기에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공수작전을 수행했으며, 서방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NATO를 창설했다. 그리고 그는 소련의 원자탄 실험에 대응하려 미국의 수소탄(the Hydrogen Bomb) 개발을 결정했다. 이런 중대한 결정들을 통해 그는 전후 자유민주주의를 보전하기 위한 국제질서의 구조를 창조했던 아주 탁월한 세계적 지도자로 올라섰다. 그리하여 그는 서양문명과 그것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당시 소련 주도의 세계적 공산 침략으로부터 한반도의 소위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수립된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구원한 일종의 '대부(Godfather)'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용기 있는 지도자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트루먼의 전기작가 알론조 햄비(Alonzo L. Hamby)의 평가처럼, "트루먼은 처칠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중요성에서 처칠다웠다."

윈스턴 처칠도 트루먼 대통령을 그의 면전에서 평가했다. 한국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던 1951년 10월 26일 영국의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여 대영제국의 수상으로 복귀한 77세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다음 해 1월 미국의 워싱턴을 방문하여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그때 그곳에서 처칠 수상은 당시 세계정세와 소련제국의 위험과 패러독스에 관해서 말하면서 미국의 핵무기 능력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미군을 한국에 파병한 트루먼의 '위대한 결정'을 포함하여 자유세계의 트루먼 리더십을 따뜻하게 칭송했다.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을 쳐다보면서 처칠은 천천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번 당신과 나는 포츠담에서 회담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나는 그때 당신을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나는 당신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싫었다. 나는 당신을 잘못 판단했다. 그때 이후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서양문명을 구했다."

1991년까지 소련 공산제국의 붕괴는 맥아더가 촉구했던 것처럼 공산주의자들과 전면전을 수행하기보다는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더 지혜로운 정책을 선택했고 역사는 맥아더가 아니라 트루먼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트루먼의 결단이 옳았다. 무서운 핵 대결 없이 냉전에서 승리에 대한 트루먼의 기여는 그를 미국의 역사에서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아니, 그보다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그가 사망한 지 20여 년 후인 1990년대 미국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아이콘으로 부활했다. 퓰리처상(The Pulitzer Prize)을 수상한, 1992년 데이빗 맥컬로프(David McCullough)의 트루먼 전기는 수백만 미국인들의 사이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참으로 비범한 대통령이었다는 믿음을 심화시키면서 지속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트루먼은 30년 동안 직업적 정치인으로 살면서 명성을 얻었다. 적자생존의 사회적 다윈주의(Darwinism) 세계에서 정치적 정상에 오르는 것은 미국인들이 대변하는 가치들의 승리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Hegel)의 역사철학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트루먼은 역사상 민주주의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세계사적 인물(a world historical man)'들 중 한 사람이었다. 미국사에서도 트루먼은 미국이 낳은 탁월한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0년 10월 '월스트리트저널'이 실시한 조사 결과 미국 대통령의 평가순위에서 제7위에 올랐고 그 후 2017년 C-SPAN에 의한 조사에서 제6위에 오른 대통령이었다.

한국인들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크나큰 국가적 은혜를 입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는 트루먼 대통령의 동상이 있다. 이것은 이 땅에 세워진 유일한 외국 국가원수의 동상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실은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왜곡된 역사교육의 결과로 인해 한국인들에게 대체로 올바르게 인식되거나 기억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트루먼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남침했을 때 거의 즉각적으로 미국의 참전을 결정했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빛나는 영웅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사령관을 전쟁 중에 해임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염원인 북진통일을 좌절하게 한 인물로, 오히려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한국인 중심의 피상적 역사관이며 후에 세계사는 맥아더 장군이 아니라 트루먼 대통령이 옳았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그는 거의 전적으로 잊히고 말았으며 학문적으로도 주요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23년 7월 27일 정전 70주년 기념일에 경북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과 함께 트루먼 대통령의 새 동상이 설치되었다. 이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안타깝게도 참으로 궁색해 보인다.

트루먼의 용기 있는 행동 중에서 그가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한 것은 한국전에 미군을 투입하는 참전 결정이었다. 그는 오늘 그가 방금 내린 것과 같은 결정을 해야만 하는 일이 절대 없도록 희망하고 또 기도했다고 말했다. 최종적 분석에서 그는 막 창설된 유엔을 위해서 그 결정을 했다. 그는 과거에 국제연맹을 믿었지만, 그것은 실패했다. 이제 미국이 유엔을 시작했다. 그것은 미국인들의 아이디어였다. 그리하여 그것의 이 첫 번째 시험에서 미국은 그것이 실패하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트루먼의 이 참전 결정에 대한 설명의 관점에서 보면 트루먼은 순전히 군사 전략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국제법과 도덕적인 관점에서 참전을 결정한 것으로 보였다. 당시 한국은 군사전략적으로는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 밖에 있었으며 당시에 누구도 한국의 군사전략적 가치를 언급한 인사가 없었다. 트루먼은 결코 마키아벨리 같은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그의 정책결정에서 법과 도덕을 중요하게 간주한 진정한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그의 이상주의는 그가 젊은 시절 존경했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영향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독서가 트루먼이 마키아벨리를 읽었다는 흔적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시대에 해리 트루먼은 우연한 대통령이었기에 일반적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그가 속한 민주당원들 사이에서조차 결코 사랑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의 지지를 받으면서 백악관을 떠났다. 마치 로마의 킨키나투스나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처럼 그는 미련 없이 백악관을 떠나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로 돌아가 소박한 시민의 삶을 살았다.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스스로 평범한 '시민 트루먼'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는 퇴임 후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을 대통령이라는 국가의 '하인'에서 '시민'으로 승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의 임기를 두 번으로 제한한 수정헌법 제22조에도 불구하고 그 수정헌법이 제안될 때 현직 대통령에게는 적용되지 않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그는 실제로 1948년 선거에서 단 한 번 당선되었기 때문에 그가 원하면 재출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윈스턴 처칠은 "인간이 권력의 정상에 도달해서 많은 장애물을 극복했을 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결코 나폴레옹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의 전임자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아니었다. 그는 18세기 조지 워싱턴과 19세기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보여준 절제의 덕목을 실천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았으며 그리고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도 알았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제33대 대통령 트루먼은 참으로 참된 민주적 지도자였다. 1953년 후임 대통령의 취임 직후 낙향한 트루먼은 미국의 역대 대통령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회고록을 출간하여 그 후 대통령들에 의한 회고록 집필의 전범이 되었다. 1972년 12월 26일 사망할 때까지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독서가였다. 해외 참전용사들에게 은혜를 갚듯이 지금부터라도 대한민국의 존망의 위기 시에 대범하게 대부 역할을 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새롭게 재평가하는 범국가적 노력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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