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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누족이 최근 10년 가까이 펼치고 있는 유골 반환 캠페인도 핍박과 학대 역사의 연장선이다. 일본 군국주의가 한창 치닫던 1930년대부터 일본은 인류학 연구를 목적으로 훗카이도와 사할린, 쿠릴열도에서 아이누족의 묘지를 발굴해 1000구가 넘는 아이누족의 유골을 수집했다. 도쿄대·훗카이도대 등 대학과 기관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진 유골들은 대부분이 두개골을 제외한 유골을 한 상자에 섞어 관리하는 등 개인을 특정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일본 정부의 아이누족 유골 수집은 70년대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아이누족의 유골 반환 소송에서 패소한 도쿄대의 경우 1888년과 1965년 두 차례에 걸쳐 아이누족 마을의 묘지를 파헤쳐 유골을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아이누족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이들을 위한 실효적인 대책이 마련되고 있지 않다. 이 가운데 일본 정부가 아이누족을 끌어안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도 러시아와의 쿠릴열도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이란 비판의 시각도 있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쿠릴열도 영토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선주민인 아이누족을 인정하고 포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태평양 북서부 캄차카반도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사이 약 1300㎞에 걸쳐 있는 쿠릴열도 남부 4개 섬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지만 일본은 영유권을 주장하며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누족은 국제법상 인정되는 권리 그 무엇하나도 인정받지 못했다. 지난해 8월 아이누족은 처음으로 일본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원주권(先住勸·선주권)을 요구하는 법적 다툼에 착수했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아이누족이 유엔 원주민권리선언에 따라 하천에서 연어잡이 어업권을 인정하라며 일본 정부와 훗카이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일본의 원주민족이 전통적으로 점유해온 토지나 자원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원주권 확인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것은 처음이다. 아이누족이 소송을 제기한 것도 아이누시책추진법에 아이누족을 원주민족으로만 명기했을 뿐, 원주권에 대한 조항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울뿐인 인정과 함께 아이누족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은 오랜 세월 국민정서 속에 뿌리 깊게 자리 내린 이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다. 지난 2016년 일본 내각부에서 처음으로 전국 아이누족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 조사결과에서 아이누족의 72.1%는 “차별을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일본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50.7%가 “아이누족에 대한 차별은 없다”고 응답했다. 아이누족이 아닌 일본 국민들과 아이누족 사이의 의식 차이가 극명히 드러난 것이다.
홋카이도청의 2017년 조사에 의하면 지역 내에는 아이누족 약 1만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 각지에 퍼져있는 아이누족들을 합하면 실제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확한 아이누족 인구를 집계하기 어려운 이유는 많은 이들이 차별을 피하기 위해 아이누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꺼려하는 데에 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12월, 훗카이도 현이 5개 지역에서 264명의 아이누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연령층이 올라갈수록, 여성일수록 차별을 받았다고 응답한 아이누족이 많았다. “등하교 길에 아이누 아이누 라고 불리며 돌팔매질을 당했다” “아이누 족인 것이 알려지자 파혼 당했다” “아이누의 핏줄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시댁과 남편으로부터 내 아이가 아니다. 아이를 낳지 말라며 이혼을 당했다”는 차별 사례는 오늘날 일본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해묵은 과제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