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현대 정치사 전면 등장
DJ·YS와 트로이카 시대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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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총리는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고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6·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30대의 나이에 중앙정보부장과 국회의원, 당 대표를 지냈으며 40대와 70대에 두 번의 국무총리를 지내며 국내 정치사에 숱한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김 전 총리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2인자의 길’을 걸었다.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증권파동 등 ‘4대 의혹사건’과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1963~1964년 외유길에 올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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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총리는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한 뒤 낙선했지만 그 다음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의 국회의원을 확보해 성공적으로 정치 무대에 복귀했다.
김 전 총리는 내각제를 주창하며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YS) 후보를 지원했다. 1997년 대선에서는 자신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권에 도전했다. 하지만 선거 막판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켜 김대중(DJ)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고 이는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이후 김 전 총리는 1998년 김대중정부에서 72세의 나이에 두 번째로 국무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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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총리는 대통령 보좌를 넘어 직접 국정 현안을 컨트롤하는 등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힘 있는 총리로 꼽힌다. 다만 김 전 총리는 내각제 개헌 등을 놓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2001년 9월 김대중 정부와 결별했다.
풍운의 정치인, 영원한 2인자, 킹메이커, 경륜의 정치인, 로맨티스트 등 김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정치계의 거목이었던 고인의 정치인생은 부침과 영욕이 교차한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
김 전 총리의 묘비에는 부인 고 박영옥 여사가 2015년 별세한 후 고인이 직접 쓴 문구가 적힐 예정이다. 글귀에는 “한 점 허물없는 생각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나라 다스림 그 마음의 뿌리를 ‘무항산이면 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에 박고 몸바쳤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숨짓는다”며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고 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