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문제 등 복잡한 문제는 제외하고 둘의 행복한 삶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다행히 양가 자녀들이 오랜 기간 홀로 산 부모님의 심적 입장과 건강을 고려하고 이해해준 덕분에 큰 반대 없이 수월하게 재혼할 수 있었다. 박씨 부부는 현재 법적으로 당당하고 만족스러운 재혼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 60대 사업가 김모씨는 최근 결혼정보회사에서 만난 4살 연하 여자 친구와 재혼하기로 결정했다. 엄밀히 말하면 동거였다. 각각 느지막하게 황혼이혼한 상황이었고 1년 가량 만난 뒤 재혼(법률혼)까지 생각했지만 분명 자식들이 반대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유산 문제로 양쪽 자식들이 다툴 것이 걱정됐고 동거로 인한 사실혼 관계가 될 경우에도 대비해 혼인신고는 하지 않는 대신 동거계약서를 썼다. 동거계약서에는 ‘동거 중 한 사람이 먼저 죽거나 다시 이혼하게 될 경우 본래 재산은 그대로 나눈다’ ‘동거 기간에 생긴 재산은 절반씩 나눈다’는 내용 등을 적었다.
황혼이혼이 증가함에 따라 황혼재혼도 늘어나는 추세다. 통계청이 30년간(1982~2012) 이혼과 재혼 자료를 분석한 ‘우리나라의 이혼·재혼 현황’을 보면 이 기간 여성의 재혼 증가율(227.6%)이 남성의 재혼 증가율(93.5%)을 크게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2006년 이후 남녀의 재혼은 다소 감소했으나 같은 기간 50~60대 이상 황혼재혼은 계속 증가해왔다.
하지만 황혼재혼이 법률혼인 경우에는 재산 분할 등 이해관계가 얽혀 많은 제약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잘하면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지만 잘 못하면 재산을 둘러싼 법적 분쟁에 시달릴 수 있다. 황혼재혼의 경우 재혼을 결정하게 되는 단계에서부터 재혼 생활의 유지까지 자녀들의 반대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법무법인 세광 정재은 변호사는 “민법이 정한 법정상속분이 배우자의 경우 자녀보다 0.5배가 더 많기 때문에 상속재산 분배를 염려한 자식들이 부모의 재혼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고 재산이 많은 부모일수록 자식들의 반대가 더 심하다”고 말했다.
최근엔 황혼재혼 트렌드에도 변화가 생겼다. 황혼동거를 선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 법률혼으로서의 재혼은 유산을 둘러싼 갈등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자식 눈치에 혼인신고를 하지는 않지만 변호사 사무실에서 동거계약서를 작성하기도 한다. 사실혼 관계에 있으면서 위자료나 재산분할을 청구하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서로 헤어지게 되더라도 동거 전·후 재산에 대해선 명확히 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황혼동거 문제 역시 간단하지 않다. 단순 동거는 법률혼보다 갈등 관계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순 있지만 법적 규제를 덜 받아 안정성이 떨어지는 탓에 한쪽이 버려지거나 자식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쫓겨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정 변호사는 “동거는 사실혼과 달리 위자료나 재산분할 청구가 불가능하다”며 “하지만 동거와 사실혼의 구분 및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사실혼으로 주장할 경우를 대비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동거계약서(주로 위자료나 재산분할 청구를 방지하려는 문제)의 사실혼 관계라 하더라도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일체 위자료나 재산분할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위자료 청구나 재산분할 청구를 미리 포기하는 내용의 계약서를 쓰면 나중에 법적으로 효력을 인정받기 어렵다”며 “어떠한 법률관계가 성립하기도 전에 미리 권리를 포기하는 식의 내용은 법률상 인정받기 어렵고 계약 내용이 사회상규에 반하거나 불공정한 경우 효력을 인정받지 못 한다”고 강조했다.
황혼재혼을 잘하기 위해선 먼저 황혼재혼 및 동거의 문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 변호사로부터 황혼동거 실패 사례와 법적 분쟁에 대해 들어봤다.
<사례1>
황혼재혼을 했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고 4년간 함께 살던 중 남편인 B씨가 바람을 피웠다. 부인 A씨는 B씨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음을 전제로, B씨가 사실혼 관계를 부당하게 파기했다는 이유를 들어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청구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사실혼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관적으로 당사자 사이에 혼인의 의사가 합치되고, 객관적으로도 사회관념상 부부공동생활이라고 인정할 만한 혼인 생활의 실체가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원고(A씨)와 피고(B씨)가 2007년 6월 말께부터 2011년 2월 말경까지 피고의 집에서 동거한 사실은 인정되나 △원고·피고가 결혼식을 하지 않은 점 △원고·피고는 동거 기간에 서로 상대방의 자녀들과 교류하지 않았던 점 △원고가 짧지 않은 동거 기간에도 불구하고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피고의 집 주소로 이전하지 않았던 점 △피고와 원고는 각자의 재산과 수입을 스스로 관리해왔던 점 △원고가 동거 기간 동안 피고로부터 생활비나 용돈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말한 점 등에 비춰, 원고·피고가 상당 기간 동거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원고와 피고 사이에 주관적으로 혼인의사의 합치가 있었고 객관적으로도 혼인 생활의 실체가 존재했다고 보기는 부족하다며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황혼재혼 부부의 경우 자녀들의 반대나 상속 문제 등을 염려해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실혼 부부로 지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동거에 해당할 뿐 사실혼 관계는 인정받지 못해 재산분할 및 위자료 청구가 기각된 사례다.
<사례2>
70대 남자 A씨는 실버타운에서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중 2006년 지인의 소개로 B씨를 만나게 됐다. A씨는 부인과 이혼을 했고 B씨는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교제를 이어가다 이듬해부터 실버타운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가족은 물론 이웃에게도 서로를 부부로 소개하고 여러 차례 부부동반 여행을 다녔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A씨는 같이 살던 중 B씨에게 본인 소유 건물 지분의 절반을 주기도 했으나, 둘 사이에 다툼이 잦아지면서 동거는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B씨는 두 사람 사이가 사실혼 관계였다고 전제, 사실혼 관계 파탄의 책임을 A씨에게 물으면서 21억원의 재산분할을 청구했다. 이에 A씨는 “단순한 동거관계였을 뿐 혼인의사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두 사람이 5년 이상 함께 살며 서로를 ‘여보’ ‘당신’이라고 부른 점 △가족은 물론 이웃에게도 자신들을 ‘부부’라고 소개한 점 △명절을 함께 보내고 상대방 부모의 묘소에도 같이 다녀온 점 등에 비춰, 두 사람이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고 판단하고 A씨로 하여금 B씨에게 재산분할로 4억1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