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민족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되었다고 날조
3.1919년 8월 남만주 무장독립투쟁부대 결성했다고 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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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15편
김일성은 증조부 김응우를 최초의 반제애국투사로 날조한 수법과 수법으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을 항일독립운동의 선구자로 날조했다.
이 날조내용은 대략 이렇다. 김형직이 1919년 3?1운동 때 시위군중을 조직 동원하여 크게 활동했기 때문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시위운동을 했으며 어느 감옥에 투옥되었느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이런 선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2년 4월 10일이다. 김일성 집단은 기관지인 ‘로동신문’에 ‘김일성 장군 약전’이란 기사를 발표했는데 거기서 김형직의 3?1운동 경력에 대해 언급했다.
이 기사는 김일성집단이 김일성의 가계에 대해 최초로 공식발표한 것이라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전에는 북한은 김일성의 경력에 정식으로는 한번도 발표한 일이 없었다. 1952년 4월 10일에 이런 공식발표를 하게 된 데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그 해 4월 15일에 김일성이 만 40세 생일을 맞은 것과 때를 맞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6.25전쟁이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휴전회담이 진행되며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던 시기를 맞춘 것이었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김일성은 당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공식발표된 김일성의 경력은 여러나라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공식 발표라는 것은 다시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변경된다면 처음 나온 것이 거짓말이 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후 책이 나올 때마다 김일성과 그의 아버지 김형직 경력이 자꾸 바뀌었다. 1952년에는 김형직이 3?1운동 때 투옥까지 당한 항일투사였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다 1961년 나온 책부터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새로운 이야기로 변경된다. 3?1운동 때 김형직이 투옥되었다는 이야기는 싹 없어지고 그 대신 1916년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로 바뀐다.
그런데 1916년에 어떤 일로 투옥되었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저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됐다는 것 뿐이다. 몇 달 동안 감옥에 있었다는 말도 없었다. 역사를 서술할 때는 ‘6하 원칙’이 있어야 한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등의 여섯가지 조건을 충족해햐 하는 하는데 북한은 오로지 투옥만을 내세우고 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 만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26년에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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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바뀐 김형직의 경력은 1968년에 나온 책에서 다시 또 변경된다. 1916년에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다는 말이 없어지고 대신 1917년에 투옥된 것으로 바뀐다. 여기서 김형직의 경력에서 줄기가 되는 ‘조선국민회 사건’이 나온다.
조선국민회는 김형직이 조직 영도한 항일비밀 결사로 3?1운동 이전 단계에서 최대 규모의 비밀결사였고 1917년 3월 23일 평양에서 발족했는데 이 때문에 김형직이 그 해 가을에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다음해 가을에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다 날조다. 조선국민회 사건은 있었던 사건이다. 그런데 여기에다 김형직을 끌어 붙인 것이 날조다. 조선국민회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평양사람인 장일환(張日煥)은 29세이던 1914년에 하와이로 갔다. 그는 거기서 독립운동가인 박용만(朴容萬)을 만나 크게 감화를 받고 자기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결심한다.
그는 국내에 돌아와서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해외의 독립운동과 보조를 같이 할 것을 약속하고 1915년 4월에 귀국한다.
그는 평양을 중심으로 동지를 규합했다. 1917년 3월 23일에 우선 9명의 동지와 더불어 모임을 ‘조선국민회’라고 짓고 자신이 회장이 된다. 그런데 이 비밀결사를 평양 경찰서가 발각했다. 회원은 모두 25명이었다.
평양 경찰서는 이들을 1918년 2월 9일에 검찰에 송치했다. 장일환 외 12명은 구속 송치하고 나머지는 불구속 송치했다. 이들에 대한 재판 관계 기록은 없다.
사건의 진상이 이렇다. 별로 큰 사건이 아니다. 그 당시 이정도 사건은 쉴 새 없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기록에는 장일환이 모임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으로 되어있지 김형직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또 13명이 구속되었는데 북한에서는 100여명이 구속 투옥되었다고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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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자 김일성은 그 일본의 자료집까지 다시 변조해서 김형직을 아예 장일환 대신에 회장 자리에다 갖다 놓고 조선국민회를 조직지도한 사람이 김형직이라고 선전하게 된 것이다. 바로 그렇게 나온 것이 1968년의 책이다. 이렇게 이중 날조된 조선국민회 기록이 조선혁명박물관에 일제의 기록이라고 붙어 있다. 1968년의 기록에는 이렇게 김형직이 죽을 때까지 변치 않고 항일독립운동을 한 민족주의자였다고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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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선전이 1971년에 나온 책부터는 또 변경된다. 민족주의자였다는 부분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주장으로 바뀐다. 즉 김형직은 1919년 3?1운동 이후부터는 민족주의 운동으로는 도저히 나라를 찾을 길이 없다고 보고 공산주의 운동만이 나라를 찾는 길이요 옳은 나라를 세우는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주의자 중에서는 제일 먼저 공산주의자로 방향을 전환한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전이 또 1981년에 나온 책에서는 또 바뀐다. 1981년에 나온 책에서는 김형직이 소위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옥중에 있을 때인 1917년 11월에 러시아 혁명 소식을 듣고 공산주의 혁명만이 자유 해방의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갈수록 소설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북한의 역사 날조 기법이다. 북한은 김일성의 경력과 그 선대들의 경력을 날조할 때 하나의 좌표를 가지고 있다. 그의 가정과 성장과정, 투쟁경력을 레닌과 모택동의 본을 딴다. 그런데 레닌과 모택동보다도 매사에 더 위대하고 더 혁명적이고 더 투쟁적이었던 것으로 날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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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러시아혁명 전에 러시아에는 인민주의라는 혁명사상이 있었다. 레닌의 형이 인민주의자로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그러나 형의 죽음을 겪은 레닌은 성장한 후에 인민주의로는 안되겠다고 해서 공산주의 혁명에 나섰다.
김일성도 아버지가 독립운동으로 투옥됐을 때 어머니와 같이 면회하러 갔다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싸울 것을 결심하고 성장한 후에는 아버지의 민족주의로는 안되고 공산주의라야 독립이 된다고 아버지와 달리 공산주의혁명의 길로 나갔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처음에 이렇게 선전했다. 그러던 것이 러시아혁명 과정의 플레하노프라는 인물을 주목하고 이 인물 모델을 김형직에 갖다 붙인다. 플레하노프는 처음에 인민주의자였다가 해외로 망명해서 마르크스의 저서를 접하고 인민주의를 청산하고 공산주의자가 된다.
레닌도 블레하노프가 번역한 자본론으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은 레닌이 성공시켰지만 레닌은 플레하노프로 말미암아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북한은 1971년부터 나온 책에 이 플레하노프 모델을 김형직에 갖다 붙였다. 즉 러시아에서 플레하노프가 인민주의자에서 공산주의로 최초로 전환했고, 김형직은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최초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또 플레하노프에 의해 레닌이 공산주의자가 되었듯이, 김형직에 의해 김일성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 그런 레닌이 러시아혁명을 성공시켰고 그런 김일성이 조선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식이다.
북한은 또 1980년부터 1982년 여름까지 총 33권의 ‘조선전사’라는 책을 발간하는데 여기서 또 김형직 경력을 바꾸어 날조한다. 즉 김형직이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영도하는 조선국민회 회원들을 민중시위에 참가시켜 간접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쳐다는 것이다.
이 조선전사에서 북한은 김형직이 1919년 8월에 남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모아놓고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노선을 밝히고 조선국민회 회원들로 독립군 부대를 결성했다고 날조하고 있다. 이 독립군부대가 동남만주에서 일어났던 첫 번째 독립군 부대며 독립군 투쟁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 만주에는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라는 세 개의 독립운동단체가 있어서 그 통합이 독립운동가들의 당면과제였다. 이를 위해 어떤 사람이 노력했는지 역사의 기록에 소상이 나와있다. 도대체 김형직은 이런 기록에 이름이 없다. 그는 이런 기록에 나올 인물이 아니었다.
김형직의 실제 경력은 1894년 생으로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시골 서당에서 훈장 노릇을 했다. 1919년 5월에 만주로 건너가 한의사로 생계를 꾸렸다. 이후 그는 한의사로 크게 돈을 벌었고 만주의 무송(撫松)으로 건너가 한의원을 계속했다. 민족의식이 있었던 그는 남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 산하단체 회원이었다.
그 무렵 남만주에 공산주의운동이 일어났다.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을 가장 싫어했기 때문에 사상이 맞지않으면 마구 살인을 하고 다녔다. 김형직은 성질이 깐깐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약도 팔지 않았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는 1926년 6월에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로 사망하게 된다.
사실이 이러한 그를 북한은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느니 항일투쟁의 완벽한 선구자였다고 날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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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 주동도 날조였고 아버지 김형직의 경력도 날조였다. 또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도 완전히 날조다.
북한이 이런 식으로 선대들의 경력을 날조하는 것은 권력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김형직과 김일성 부자간의 사상 및 혁명 과업 세습관계가 김정일로 김정은으로 3대 세습까지 이어지도록 만든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한 대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가며 계속 혁명으로 완성해 나가야 하며 혁명의 수령에 대한 충성도 대를 이어가며 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