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 서동원.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이름이다. 하지만 같은 이름의 서동원이어도 세대에 따라 떠올리는 주인공은 다르다. 헷갈리는 동명이인 축구스타 서동원에 대해 알아보자.
‘작은’ 서동원
현재 부산아이파크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서동원은 젊은 축구팬에게 잘 알려진 선수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지난 1998년 대전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서동원은 올림픽대표와 국가대표를 거친 수준급 미드필더다. 8번의 A매치에 나서 지난 2000년 네덜란드와의 친선전에서는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대전, 수원, 전북, 광주, 인천, 성남을 거쳐 부산에 둥지를 튼 서동원은 대전의 권집과 함께 현역 선수 중 가장 많은 이적(6회)을 한 선수로도 잘 알려져 있다. 팀을 여러 번 옮기면서도 10년간 K-리그 229경기에 나서 16골 12도움을 올린 그는 넓은 시야와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선보이며 안정적인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2001년, 대전에서 수원으로 이적할 당시 5억 원의 이적료로 최고 기록을 세웠던 그는 고비 때마다 다시 일어섰다. 수원 시절 주전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며 좌절했던 그는 이듬해 전북으로 팀을 옮겨 재기에 성공했고 2006년 성남에 입단해서도 비슷한 상황을 겪자 부산으로 이적해 다시 한 번 주전으로 도약했다.
현재 부산의 중원을 책임지는 그는 서른셋의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왕성한 활동력과 패싱력으로 팀을 이끌고 있다. 부산의 황선홍 감독 역시 서동원에 대해 “기술을 잘 갖춘 선수다. 경기를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좋아 그를 빼놓고 팀을 운용할 수 없다”고 밝힐 만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완소’ 서동원은 이 한 명이 아니었다. 1990년대 한국축구의 유망주로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또 다른 서동원도 있었다. 부산의 서동원에 현재의 젊은 팬들이 열광한다면 10년 전의 젊은이들은 다른 서동원에 열광했다.
‘큰’ 서동원
1991년, 전국고교축구대회 결승에서 당대 최고 라이벌 부평고를 침몰시키는 결승 프리킥을 꽂아 넣었던 중동고의 서동원. 그는 같은 해 1991 포르투갈 세계청소년대회의 주전 공격수로 세계무대에 도전했다.
당시 구성된 남북단일팀은 ‘남측 수비, 북측 공격’이라는 전술을 내세워 조직력 극대화에 주력했지만 서동원과 조진호는 남측 출신이면서도 예외적으로 공격수에 선발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대회 8강의 주역이 된 서동원은 이후 1993년 호주세계청소년대회에도 참가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 무렵 고려대학교 진학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그에게 뜻밖의 시련이 닥친 건 1995년 말. 서동원은 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포항에 지명됐지만 ‘신장염’ 판단을 받고 프로축구사상 첫 입단 취소의 아픔을 겪게 된 것이다. 조금만 운동을 해도 피로해진다는 ‘신장염’은 운동선수로서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병마를 이겨내고 1년 뒤 다시 울산에 입단한 그는 1998년 월드컵 예비엔트리 29명에 이름을 올려 축구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울산에서 세 시즌 동안 22경기에 나서 2골을 기록한 그는 2000년 독일 분데스리가 3부리그 SV아인트라 트리어에 진출해 재기를 노렸지만 3개월 만에 실패를 맛보고 국내로 돌아왔다. 서동원은 현재 한국에 23명 뿐인 P급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내셔널리그 창원시청의 코치로 재직 중이다.
두 명의 서동원은 그간 우리를 웃기고 울렸다. 같은 이름만큼이나 비슷한 악조건을 경험한 두 선수. 비록 한 명의 서동원은 그 위기를 극복해 K-리그에 안착했고 다른 한 명의 서동원은 끝내 좌절하고 말았지만 이 두 명의 서동원이 우리에게 남겨준 감동과 환희의 크기는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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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은’ 서동원(左), ‘큰’ 서동원(右)-부산아이파크, 창원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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