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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의 스포츠人] “인생 2라운드...복싱 중흥 위해 힘 보탤 것”

[장원재의 스포츠人] “인생 2라운드...복싱 중흥 위해 힘 보탤 것”

기사승인 2024. 09. 0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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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철 전 WBA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이형철
이형철 전 WBA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장원재 스포츠전문기자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섬유회관 이벤트홀. 프로복싱 KBM 2대 타이틀매치 오픈 경기 가 끝나고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형철(54) 전 WBA 슈퍼플라이급 챔피언의 세계타이틀 획득 30주년 기념행사였다. 1994년 9월 18일, 동급 세계랭킹 1위 이형철은 24전 전승 17KO의 인기절정 미남복서 오니즈카 가쓰야를 9회 2분 55초에 통쾌한 TKO로 물리치고 세계 정상에 등극한다. 통산 전적은 25전 19승(15KO) 6패.

- 세계 챔피언에 오른 날이 벌써 30년이 됐다.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나.

"다들 제가 질 것이라고 했지만, 저는 이긴다는 확신을 가지고 도쿄로 갔다. 오니즈카 가쓰야의 6차 방어전이었는데, 임재신, 이승구 등 한국 선수에게 두 번이나 논란있는 판정승을 거둔 상태라 우리로서는 꼭 이겨야 하는 선수였다. 당시 세계 타이틀전 8연패, 챔피언 무관의 한도 풀고 싶었다."

- 훈련 과정에서 승리를 확신한 이유는.

"준비 기간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세계랭킹 1위로 지명 도전 자격을 가질 때 까지 기다려 왔던 경기이고 그동안 준비를 굉장히 열심히 했기 때문에 무조 건 이긴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 경기 당일엔 몇 라운드쯤 이긴다는 확신이 들었나.

"시합을 하다 보면 타격에 감이 온다. 5라운드부터 오니즈카의 동공이 풀리는 게 보였다. 결정적으로 제 보디블로를 많이 맞아서 갈비뼈에 금이 갔다. 많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확실하게 느꼈다."

- 영국인 주심 존 코일이 오니즈카 가쓰야 선수를 생각해서 그랬는지 일방적 으로 판세가 기운 후에도 경기를 끊지 못했다. 그래서 레퍼리 스톱 직전엔 챔피언의 모습이 다소 처참했다.

"맞다. 그 선수가 일단 눈 망막이 찢어졌다. 그다음에 턱뼈, 코뼈가 부러지고 갈비뼈도 두 대가 부러질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 오니즈카는 그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경기 전에, 저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쪽에서는 굉장히 아쉬웠을 거다. 전승으로 멋있게 은퇴하고 결혼하려던 계획이 틀어진 거니까. 약혼자도 그날 경기장에 와서 구경했다."

- 경기는 어땠나.

"둘 다 페어플레이하면서 굉장히 시합을 잘했다. 깔끔했다. 클린치도 많이 안 하고, 서로 매너 좋게 정말 잘했다. 그런데 복서가 어느 정도의 레벨이 되면, 상대가 어느 정도의 충격을 받고 있고 어느 지경까지 와 있다는 걸 알 수 있 다. 눈동자를 보면 바로 안다. 때릴 때마다 동공이 열리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 다. 한 대 맞을 때마다 동공이 열리고 '타격이 가고 있구나'라는 것이 주먹에 바로 느껴진다. 그리고 상대의 반응을 보면 거의 정확하게 상황 판단이 된다."

- 혹시 어차피 이긴 시합인데 심판이 좀 끊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나.

"그런 생각도 좀 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맞으면 많이 위험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 경기 끝나고 장내 링 아나운서와 즉석 인터뷰했다. 아버지와의 약속 얘기였다.

"맞다. 제가 세계랭킹 1위로 올라가기까지 6년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버지가 위암 말기 선언을 받았다. 그동안 고생만 하시며 사셨는데, 끝내 수술을 안 받으시겠다는 거다. 그래서 그러면 저도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세계타이틀전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부자가 약속했다. 저는 세계 챔피언이 되 고, 아버지는 수술받고 완쾌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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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철(오른쪽)이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섬유회관 이벤트홀에서 열린 세계타이틀 획득 3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전형찬 제공
- 고향은 어디인가.

"전라북도 김제다."

- 언제 복싱이 이형철 챔프에게 손짓했나.

"손짓을 한 게 아니고 제가 찾아갔다. 어렸을 때 집이 워낙 가난했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굉장히 힘들게 살았다. 제가 어렸을 때는 복싱 인기가 최고 였다. 지금 월드컵 축구 정도로 인기가 굉장했다. 또 복싱이 돈이 안 드는 운동이다. 도구 살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챔피언만 되면 집안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체육관을 찾아다녔다."

- 김제에 있는 체육관이었나.

"아니다. 5살 때 서울로 올라왔다. 국민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계속 살았 다."

- 세계랭킹 1위까지 갔지만 다른 엘리트 복서와는 달리 초창기 전적이 1승 3 패다. 그다음엔 거의 안 졌지만. 전적 관리를 못받은 거다. 그래서 초대 WBA 미니멈급 챔피언 김봉준과 더불어서 이형철은 이른바 잡초류를 대표한다.

"집안 환경이 어렵다 보니 굉장히 거칠게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싸움도 많이 했다. 원래는 레슬링을 해서 올림픽에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권투로 성공을 해야 사랑도 많이 받고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 복싱으로 전향한 거다."

- 이형철 챔프가 복싱에 입문할 때는 복싱 인기가 대단해서, 박종팔 챔프는 경기 한 번 할 때마다 대전료로 집 한 채가 생겼다고 했다.

"1994년 무렵에는 한국 복싱 열기가 시들어서 집 한 채가 안 생겼다. 하하. 훈련비 지원 등 후원자도 많이 끊어져서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지명 도전 아니면 세계 도전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그래서 어떻게 했나.

"세계랭킹 6위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제가 소속한 원진체육관 김규철 관장님께서 일본하고 교류가 굉장히 좋았다. 일본 민단의 유력인사가 후원하는 조건으로 일본에서 경기도 하고 체육관 이름도 그분 회사 이름으로 바꿨다. 원진체육관은 김태식, 이상호, 변정일, 최요삼 등 쟁쟁한 선수들을 배출한 곳인데, 복싱 인기가 시들어가면서 그 원진 체육관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 천신만고 끝에 세계 챔피언이 됐는데, 대전료는 한국 프로복싱 절정기에 비해 어느 정도였나.

"절반도 안 됐다. 지명 도전이라 대전료도 3만 달러밖에 못 받았다. 거기서 매니저 몫 33%, 트레이너비 10% 떼고 세금냈더니 번 돈이 거진 다 없어졌다."

- 그럼 좀 맥이 풀렸을 것 같다.

"맥이 풀렸지만, 다음 경기가 있으니까. 그리고 또 세계 챔피언이 되면 민단 회장님께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신 게 있었다."

- 어떤 소원이 었나.

"세계 챔피언이 딱 되고 나서 말씀드렸다.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고생했는데, 아직 집 한 채 없다. 그러니 아파트 하나 사달라고 해서 집까지 보러 다녔다."

- 집 사줬나.

"안 사주셨다. 1차 방어전 끝나면 해주겠다. 2차 방어전 끝난 뒤 사주겠다, 계속 말이 바뀌었는데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멋지게 승리해서 그 회사 인지도가 굉장히 높아졌다. 그런데 그런 약속이 안 지켜지니까 실망이 컸다."

- 2차 방어에서 4라운드 종료 후 상대의 펀치를 맞고 쓰러졌다. 당연히 반칙 승인데 주심은 이형철의 KO패를 선언했다. 일어나 계속 경기할 수도 있었는데 안 일어났다. 이른바 논란의 4라운드 KO패' 사건이다.

"집 문제가 표류해서 은퇴할 생각까지 했었다. 나 그러면 안 한다고 그러니까 2차 방어전 마치면 해주겠다고 했다. 명목만 후원이었지 그때까지 뭐 받은 게 하나도 없었다. 월급을 받은 것도 없고 그런 부분이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그랬더니 이번 한 번만 더 하라고 했다."

- 경기 전부터 의욕이 떨어진 상태였나.

"맞다. 그리고 정말 외로웠다. 지금처럼 유튜뷰가 발달했다면 저를 기억하고 응원하는 팬들이 계신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 당시에는 외롭고 힘들고 막막했다. 세계 정상에 올랐는 데도 미래에 대한 보장이 안 되니까."

- 4라운드 때 일어날 수 있는데 안 일어났다. 후회하나.

"사실은 많이 후회한다. 일부러 누운 것이 맞다."

- 팬들은 반칙승을 기대하고 누운 거라고 생각했다.

"맞다. 그런 기대도 했다. 그런데 제가 좀 비겁했다. 저를 지켜봐주는 팬들이 그렇게 많이 계셨다는 걸 알았으면, 심판 판정이 어찌 되었든 일어나서 끝까지 경기를 했어야 한다."

- 오늘 대회에서 협찬도 많이 했다. 대웅제약그룹 산하 (주)한올바이오파마 부장이다. 복싱으로는 아니어도, 제약회사 간부 사원으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26년째 한 직장에 다니고 있다. 영업사원 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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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철(왼쪽 다섯번째)이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섬유센터홀에서 열린 프로복싱 KBM 한국 미들급 챔피언 결정전 경기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형찬 제공
- 어떻게 회사원이 될 생각을 했나.

"운동 선수들, 특히 투기 종목 선수들은 혼자하는 운동하다 보니 사회 적응을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운동 그만두고 은퇴할 때쯤 사기도 많이 당한다. 사업도 잘 망해서 노후가 좀 안 좋더라. 그런 부분을 봤을 때 '나는 좀 다르게 살 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현역 때부터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운동과 병행했 다."

- 어떤 일을 했나.

"커피 전문점에 가서 서빙도 하고, 권투계 바깥의 일반인들을 많이 만났다. 복싱계 선배 중엔 주점을 차리신 분이 있었는데, 술 취한 사람 상대하며 같이 술 먹으니 몸이 망가지는 게 보였다."

- 아르바이트 때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나.

"몇 분 있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 어떻게 지금 회사에 들어갔나.

"커피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 가게를 직접 인수했다.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며 체육관에서 하루 4시간씩 지도하고 있었는데, 그때 회장님이 단골로 자주 찾아주셨다."

- 전 세계 챔프 이형철을 알아보신 건가.

"커피점에 사진을 걸어놨다. 또 주변 상인들한테 평판이 좋았다. 그분들이 '여기 세계 챔피언이 하는 커피 전문점이 있으니 가보시라'고 했단다. 왜 세계 챔피언이 이렇게 커피 전문점을 하냐고 하셔서 사회 경험을 하려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회장님이 회사에 지원 한번 해보라고 해서 정규 사 원으로 입사했다."

-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권유하신 건가.

"그렇다. 평사원으로 들어가서 지금까지 인정받고 집도 사고 결혼도 하고 계속승승장구해서 아마 연봉도 제가 가장 많이 받는 부장일 것이다. 회장님께 감사 드린다."

- 신입사원 교육이 힘들지는 않았나.

"처음엔 엄청 힘들었다. 제가 1998년 입사다. 1997년에 IMF 사태가 터지지 않았나. 1998년 당시에 15명 모집에 경쟁률이 88대 1이었다. 그 정도로 사람이 몰렸는데 제가 당당하게 합격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 다닐 수 있었다. 영업사원부터 시작, 밑바닥부터 단계를 밟아 올라왔다."

-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우리나라 복싱이 굉장히 침체기다. 반면에 일본이나 필리핀 같은 경우는 프로복싱 인기가 엄청나다. 현재 일본은 세계 챔피언이 8명이다. 경량급은 다 일본에서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랬었다. 1980년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때 세계 챔피언을 6명까지 보유했다. 그때는 일본인 세계 챔프가 한 명도 없었다. 복싱도 사이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바닥이었을 때 우리가 전성기를 누렸는데, 지금은 우리가 아예 바닥이고 일본이 전성기다. 우리 나라에서도 훌륭한 선수만 나타나면 충분히 흥행이 될 것이라 본다. 일본과 경쟁하고, 세계로 다시 나갈 수 있다. 그 일을 하고 싶고 또 할 예정이다. 앞으 로는 후배 양성이라든지, 대회나 선수 스폰을 한다든지 그런 부분들을 많이 고려하고 있다. 회사와의 연결점도 늘려갈 생각이다."

산업의 종류가 많아지면 소비자의 선택권도 늘어난다. 직업 선택의 폭도 넓어 진다. 한국 복싱의 재부흥은 그래서 우리 국민의 행복 총량을 늘리는 일일 것 이다. 몽골이나 러시아, 동남아 선수들도 한국에서 선수로 활동하는 시장확대 도 가능하다. 복싱도 회사생활도 '잡초류'로 시작해 끝내 성공한 남자. 부장급 최고액 연봉자라니 이형철은 복싱 뿐 아니라 회사생활도 세계챔피언에 오른 것과 마찬가지다. 이형철 챔프는 우리 마음속의 영원한 챔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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