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 유지·관리 시스템 부족해
면허 제재시 지나친 차별이란 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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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교통사고 당시 발작 증세를 보인 뇌전증 환자의 뺑소니가 무죄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40대 여성 B씨는 2021년 2월 충남 홍성군의 한 도로에서 승용차를 몰다 앞서가던 차를 들이받은 뒤 현장을 빠져나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B씨가 발작 직후 사고 발생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채 현장을 이탈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뇌전증을 앓고 있는 운전자들이 발작 증세로 교통사고를 내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이들의 운전면허 취득·유지 조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뇌전증은 뇌신경에 과도한 전기가 흘러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거나 신체 경련이 발생하는 뇌질환으로, 국내 약 36만 명의 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흔한 병이다.
도로교통법 제82조에 따라 뇌전증은 운전면허 결격사유에 해당한다. 다만 뇌전증 환자도 항뇌전증 약을 복용하는 상태에서 1년 이상 추가적인 발작이 없는 경우 전문의 소견을 바탕으로 도로교통공단 운전적성판정위원회의 심사를 거치면 운전할 수 있다.
문제는 6개월 이상의 입원 경력이 없는 뇌전증 환자가 운전면허 취득 과정에서 자신의 병력을 자진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환자가 스스로 병력을 밝히지 않으면 면허 취득 이후 운전자의 정신질환 유무를 가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뇌전증 병력을 자진 신고하지 않고 운전면허를 발급받는다면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1년 이하의 징역형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하지만 자진 신고를 하지 않아 처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경찰청 관계자는 "뇌전증 환자가 자진 신고할 때 관련 병력을 숨긴 사실 자체 만으로 처벌하지 않는다"며 "면허 취득 당시 고의로 자신의 진료 사실을 숨긴 뒤 운전면허를 부정하게 취득한 것이 증명돼야 범죄 사실이 성립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뇌전증 환자의 운전 가능 여부를 정한 단서 조항을 엄격하게 보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대형 교통사고를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뇌전증 환자의 운전면허 유지 조건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적성검사가 부실하게 운영되고 각 운전자의 운전면허증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아직 부족하다"며 "뇌전증 환자의 운전면허를 취득·유지 단계서부터 엄중하게 바라봐야 발작 뺑소니 같은 일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뇌전증 환자의 운전면허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면 이들의 인권이 지나치게 위축될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노인, 심혈관계 질환 환자도 운전 시 위험이 따르지만 뇌전증 환자만 콕 집어 운전을 제재하는 것은 뇌전증 환자를 향한 사회적 낙인 효과만 부추길 수 있다는 비판이다. 김정빈 고려대 안암병원 신경과 교수는 "최근 1~2년 동안 증세가 없고 뇌파 검사도 문제가 없는 뇌전증 환자 소견을 1년에 20건 정도 작성해 도로교통공단에 제출하고 있다"며 "운전면허는 생업과 연관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발작 가능성이 낮은 뇌전증 환자의 운전면허 취득을 아예 금지하는 것은 지나친 차별"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