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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국의 언론인과 문화예술인 등 취재원은 물론 일반 국민들을 대할 때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려 참담한 기분이었다. 다른 얘기지만, 당시 YS가 의도적으로 두 전직 대통령을 망신 주기 위해 '범법자'를 언론에 방치했다는 뒷말도 무성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직 국가원수인데 너무 심하다는 것이 양식 있는 영국 식자들의 평이었다.
이보다 더한 일이 30년이 지난 대한민국에서 또다시 벌어지고 있으니 심사를 필설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다. 기어이 우려했던 '첫 현직대통령 체포'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현실화된 것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2차 체포영장을 15일 오전 10시 33분에 집행했다고 발표하자, 로이터·AP통신·뉴욕타임스·아사히신문·CNN·BBC방송 등 주요 외신은 이를 신속히 보도했다.
공수처와 경찰은 흉악범을 잡는 것도 아닌데 3000명의 경찰을 동원해서 윤석열 대통령 체포에 나섰다. 대통령 측 변호사들에 따르면 그 과정에서 '공문서를 위조'하는 불법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법이 다 무너진 게 아닌가. 외신들은 '한국 현직 대통령 체포는 최초, 위기가 한국 분열 드러내' 등의 제목을 달아 대서특필했다.
윤 대통령은 공수처로 향하기 직전 대국민 영상 메시지를 통해 "불법의 불법의 불법이 자행되고, 무효인 영장에 의해서 절차를 강압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보고 정말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선진 자유 민주국가에서 현직 대통령을 체포하겠다며 이렇게 막무가내로 공권력을 투입해 영장 집행을 시도하는 경우를 본 적 있는가. 윤 대통령은 출국금지로 망명 등 도주 위험이 없는 데다, 사실상 수족이 묶여 증거조작이나 인멸도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일찍이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제 체포나 구금 시도는 그 예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형평성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국회의원은 '회기 중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는다'는 불체포특권을 갖고 있는 터에 정작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영장 발부 때는 그런 불법 논란을 일으키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형사소송법이 불구속 수사를 대원칙으로 천명하고 있음에도 공수처가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도 없는 현직 대통령 체포를 위해 체포영장 발부에서부터 온갖 '편법과 불법'을 동원했다는 평가가 이어져 왔다. 무엇보다 법원이 한꺼번에 5개의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충분한 방어권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과 비교하면 형평에도 어긋난다는 비판에 힘이 실린다.
여권에선 공수처가 역량부족에도 가용한 모든 변칙을 동원해 체포영장 집행에 골몰한 이유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을 마녀사냥식으로 끌고 가려는 불순한 의도 때문이라는 비판에 많은 국민들이 수긍하고 있다.
형사소송법에서는 불구속 수사가 원칙인데다, 윤 대통령은 직무가 잠정 중단됐을 뿐 지금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자 국가 원수다.
설사 아무리 명백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고 해도 피의자의 기본권 제한은 과잉금지 원칙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 사건 초기부터 직접 수사권이 없는데도 수사권을 주장한 공수처는 지난달 중순 경찰과 검찰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았지만 줄곧 논란이 있었다. 더구나 다수의 헌법학자들은 현직 대통령이 '내란'을 벌인다는 게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재명 대표에 대한 재판은 차일피일 끌면서 유독 윤 대통령 탄핵 관련 재판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움직임을 두고도 말이 많다. 윤 대통령 측이 헌법재판소의 일괄 기일 지정을 두고 이재명 대표 등 다른 정치인 사건과의 형평성 문제까지 거론하며 반발하는 이유다. 윤미향 전 의원, 조국 전 의원과 함께 이재명 대표의 재판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유독 대통령에 대해서는 다른 어떠한 정치인과 달리 신속한 심리만을 앞세워 방어권이 지나치게 제약되고 있다.
공직선거법 사건에 대한 법정심리기간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다른 사건들 역시 정치 일정 등을 이유로 수시로 불출석, 재판연기 및 재판부 기피신청 등을 하며 재판을 지연시키고 있으며, 이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없었다. 사실이 이런데도 유독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에 대해서만 피청구인의 방어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신속한 심리만 강조되고 있다.
어쨌든 공수처와 경찰, 헌재 등은 지금부터라도 대통령에 대한 졸속하고 무리한 수사와 재판을 멈추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엄정하고도 공정하게 진행해야 할 것이다. 국가원수인 현직 대통령을 시정잡배처럼 취급하거나 근거 없이 악마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국격(國格)을 무너지게 만드는 것으로 결국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뽑은 국민들에 대한 도발로 엄청난 저항과 역풍을 부를 것이다. 무리하게 일을 저지르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류석호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