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산(山)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비바람 거센 여름에도, 눈보라 몰아치던 겨울에도 묵묵히 버티고 앉아 미동도 없다. 영겁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일관된’ 꿋꿋함이 새삼 든든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느닷없는 바이러스가 일상의 사이클을 무너뜨린지 벌써 오래다. 그동안 계절은 바뀌었다. 한기는 물러나고 따스한 볕과 달콤한 꽃향기가 ‘거리 두기’의 인내를 시험한다. 마음에 큰 산 하나 품고 조금 더 참아보자. 우레에도 꿈쩍 않을 큰 산은 각오를 새삼 다지는데 도움이 된다. 전남 영암과 강진의 경계에 월출산(809m)이 있다.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며 음미하기에 좋고 마음에 품기에도 제격인 산이다. 특히 영암 쪽에서 볼 때 더 그렇다. 이러니 훗날 월출산을 보겠다면 영암으로 향하시라. 월출산이 특별한 이유는 이렇다.
여행/ 월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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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판한 땅 가운데 홀로 불쑥 솟은 월출산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가운데 면적이 가장 작다.
월출산은 엎드려 있지 않고 벌떡 서 있다. 솟은 모양새가 독특하다는 말이다. 보통의 산은 산허리를 조금씩 높여 큰 산을 이룬다. 또 수많은 봉우리가 서로 능선으로 이어지며 제법 넓고 폼 나는 산세를 만든다. 그런데 월출산은 판판한 논밭 가운데 홀로 불쑥 솟았다. 이러니 거리를 두고 보면 산의 몸체를 통째로 볼 수 있다. 강원도 설악산 웅장한 울산바위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맞은편의 신선봉 중턱 신선대다. 평지에 솟은 월출산은 영암 대부분 지역에서 잘 보인다. 자동차를 타고 가며 봐도 좋고 풍경 멋지고 한갓진 곳에 잠깐 내려 천천히 감상해도 좋다. 월출산을 바라보며 걷는 ‘기찬묏길’도 조성돼 있다. 영암에서는 천황사에서 왕인박사 유적지까지 1, 2코스가 지난다.
여행/ 월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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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은 전체가 거대한 바윗덩어리다.
여행/ 월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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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은 전체가 거대한 바윗덩어리다.
월출산은 거대한 예술작품이다. 솜씨 좋은 자연이 산을 통째로 조각했다. 그래서 별스럽다. 무슨 말이냐면 영암에 속한 월출산은 산세가 험한 바위산이다. 산이 그냥 바윗덩어리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시간과 자연이 산을 깎았다. 이러니 산 곳곳에 기이한 형태의 바위가 부려져 있다. 날카로운 봉우리도 장관이다. ‘책바위’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고 여섯 개의 바위가 열 맞춰 뾰족하게 솟은 ‘육형제바위’는 기묘하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바위굴 ‘통천문’도 빼놓을 수 없다. 장군봉(523m), 사자봉(668m)은 어찌나 웅장하고 거대한지 맞닥뜨리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인다. 정상인 천황봉(809m)에 서면 공룡의 비늘 같은 바위 능선이 실핏줄처럼 사방으로 뻗은 장쾌하고 독특한 풍광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천황봉에서 구정봉(711m)으로 이어진 ‘바람재’의 풍경은 숨 멎을 듯 경건하다. 천황봉에서 보는, 보리 싹 푸릇하게 돋은 영암 들판이 정겹고 아스라이 펼쳐지는 강진만 바다는 봄볕만큼이나 곱다. 산을 바라보는 재미, 오르는 재미가 있다는 이야기다.
여행/ 천황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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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봉 정상에서 바라본 ‘바람재’. 바위 능선이 장쾌하게 뻗은 풍광이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여기서 잠깐, 월출산 등산 코스는 여럿이다. 이 중에서 천황사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 바람폭포-통천문-천황봉-사자봉-구름다리-천황사를 거쳐 천황사탐방지원센터로 다시 돌아오는 약 6.6km 코스를 사람들이 많이 택한다. 4~5시간 코스다. 책바위, 육형제바위, 통천문, 구름다리 등을 다 볼 수 있다. 특히 구름다리는 월출산의 명물이다. 해발 605m 높이에 설치된 구름다리는 사자봉과 매봉에 걸쳐 있다. 길이가 약 50m, 폭이 약 1m 크기다. 구름다리에서 통천문까지 이어진 구간은 ‘신선계로 향하는 길’로 불릴 만큼 풍광이 장쾌하고 암봉들이 경이롭다. 구름다리만 보고 오기도 한다. 천황사탐방지원센터에서 구름다리까지 왕복 약 2시간 거리다. 천황봉에서 바람재를 넘어 구정봉을 거쳐 도갑사로 하산하는 약 9.4km의 종주 코스(약 6시간 소요)를 택하는 이들도 제법 많다. 봄철 산불예방을 위해 30일까지 탐방로 일부 구간이 통제되는데 영암 쪽 통제구간은 영암 용암사지-홍계골(2.8km) 구간이다.
여행/ 월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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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굴 ‘통천문’
종주를 하든, 구름다리만 보고 오든 월출산에 들겠다면 각오는 단단히 해야한다. 돌멩이, 큰 바위 지르밟고 옮기는 걸음이 녹록지 않다. 등산화나 장비를 제대로 챙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게다가 출발점의 해발고도가 불과 50m가 채 안 되는 탓에 산을 오르는 수고는 1000m급 이상으로 든다. 산에서는 ‘빨리’가 무용해진다. 산은 누구에게나 비슷하고 공평한 속도를 제공한다. 혹자는 이를 ‘자연의 속도’라고 했다.
다시 월출산 이야기로 돌아오면,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였던 매월당 김시습은 이런 월출산을 두고 “남도에 그림 같은 산이 있다더니, 달은 하늘 아닌 돌 사이에서 솟더라”고 예찬했다. ‘그림 같은’ 월출산에는 그래서 ‘남도의 금강산’ ‘남도의 설악산’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매월당의 표현처럼 ‘달이 뜨는 산’이라서 월출산(月出山)이다. 상상해보시라, 거대한 바위산에 영롱한 달빛이 비추면 자태가 얼마나 고울지. 달빛 받은 월출산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다. 월출산은 독특한 산세때문에 198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홀로 솟은 산이어서 우리나라 국립공원 가운데 면적(약 41.9㎢)이 가장 작다.
여행/ 왕인박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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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박사유적지.
여행/ 구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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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림마을
어쨌든 월출산을 보고 있으면 큰 기운이 느껴진다. 실제로 월출산은 상서로운 기운으로 잘 알려졌다. 옛날 월출산에는 움직이는 바위 세 개가 있었단다. 누군가 이를 밀어 산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희한하게도 이 중 하나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 바위가 ‘영암(靈巖)’이고 그래서 고을 이름이 영암이 됐다. 백제의 학자 왕인박사, 신라시대 고승 도선국사 등이 다 영암에서 나왔는데 이게 다 ‘영암’ 덕이란다. 참고로 왕인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인 아스카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왕인의 유적지가 신성하게 여겨지고 있다. 군서면에 왕인박사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왕인이 일본으로 출발한 곳은 군서면의 구림마을 앞 상대포다. 상대포는 지금은 육지가 됐다. 구림마을은 2000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마을이다. 도선국사, 고려 태조의 책사로 활약한 최지몽, 가야금산조를 창시한 조선의 김창조 등이 이곳에서 났다. 월출산에 간다면 함께 둘러봐도 좋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