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메. 그놈의 차값이 육실허게도 비싸네. 쌀이 천오백석이네요. 나가 지금 돌릴 수 있는 돈이 10만원 정도배끼 안될 것 같으요. 그거라도 가지면 우선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것소?”
“그거면 시작할 수 있지요. 근디, 저한테는 아무 담보도 댈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한테 빌려주시는 겁니까?”
“나는 박 선생을 믿소.”
1946년 고(故) 박인천 금호 창업주는 당시 쌀 1400여 가마에 해당하는 거금을 지인에게 무담보로 빌려 전라도 광주에서 운수사업을 시작했다. 빌린 돈 10만원에다가 따로 7만원을 더 빌려서 총 17만원의 밑천을 만들었다. 두 대의 차를 구입하는데, 한 대에 8만원씩 16만원이 들었다. 중고차 두 대 중 한 대는 ‘내쉬’라는 차종이었고, 다른 하나는 35년식 ‘포드’ 5인승이었다. 남은 돈 만원으로 점포시설과 필요한 부품을 구입했다.
금호아시아나 그룹의 모태인 ‘광주택시(훗날 광주여객)’는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광주시는 버스는 물론이고 기차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 교통사정이 나쁘다는 것은 그만큼 운수업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박 창업주의 예감은 적중했다. 광주택시는 개업 당일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주문에 차 두 대가 쉴 틈이 없었다.
당시 쌀 한 가마에 20여원 하던 때에 광주택시비가 십리까지 50원이고 10리를 넘으면 km당 20원을 더 내야하는 고가임에도 주문은 빗발쳤다.
불혹을 훨씬 넘긴 46세임에도 박 창업주는 광주택시를 1960년대에 이르러 버스 134대를 보유한 전라남도의 최대 여객 운송업체인 광주여객으로 키운다.
지금은 금호석유화학·아시아나항공·금호타이어로 대표되는 금호아시아나의 역사는 박 창업주가 빌린 돈으로 산 중고차 두 대가 출발점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국내 몇 안 되는 호남재벌로 성장하기까지 몇 가지 큰 변곡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광주택시를 호남에서 제일가는 고속버스로 성장시킨 것과 이를 발판으로 현재의 금호타이어 전신인 삼양타이어를 설립해 석유화학으로 사업 영역을 넓힌 것이다.
다음은 5공 시절 예상을 뒤엎고 대한항공이 독식하던 국내항공시장에 제2민항사업자로 선정되며 그룹의 다른 한 축을 항공물류분야로 확대했던 것이다.
박삼구 회장의 주도로 대한통운·대우건설을 인수해 건설 분야까지 발을 내디뎌 명실상부한 재계 7위의 대기업으로 급성장하면서 성공신화를 새로 쓰는 듯했다. 하지만 그룹규모를 키우는데 주력했던 박 회장의 오판으로 한축으로 굳건히 남았던 아시아나항공까지 내놓으면서 사실상 중견기업으로 전락한 신세다. 그룹의 존폐도 불투명해지면서 박 회장에 대한 무한 책임을 묻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하지만 사업을 하다보면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실리콘밸리는 성공의 요람이 아니라 실패의 요람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어떤 경영자도 회사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경영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물론 방만 경영의 책임을 묻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경영에 실패한 기업인이 영원히 나락으로 떨어지게 방관하기보다는 재기할 수 있는 환경과 풍토를 마련해줘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과거 대우건설 인수 직후 박삼구 회장과 저녁을 같이한 적이 있다. 당시 선대 회장이 일군 기업을 크게 성장시키는데 일조한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호탕하게 웃던 박 회장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박 회장의 재기가 한국경제의 또 다른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