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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중국에서 보는 ‘밀회’,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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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14. 05. 15. 07:18

중국에서의 한국 드라마 열풍, 전형적인 문화의 전파 공식
밀회
밀회 포스터 /사진=JTBC 공식 홈페이지
격세지감을 느끼는 계기는 매우 다양하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1년 8개월째 베이징(北京)에 사는 현재, 하나만 꼽아보라 한다면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서 자주 한국배우들의 인사를 받는다는 사실을 들어야겠다. 20년 넘게 중국학의 세계 속에서 살았으면서 이곳에 부임하기 전까지는 상상치 못했던 일이라 감흥이 각별하다.

내게 드라마 ‘밀회’를 처음 소개한 것도 Sohu(搜狐)사이트에서 이 드라마를 광고하는 두 주연배우였다. ‘꼭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2000년 드라마 ‘아줌마’ 이래 정성주 작가에 대한 신뢰였다. 속물 대학교수와 고졸출신의 아내, 그 주변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중산층 내지 인텔리를 풍자한 이 드라마는 당시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이름을 내게 단번에 각인시킬 만큼 인상적이었다. 실제 흥행도 제법 성공적이었는지 ‘소심하고 이기적인 허세남’ 주연의 이름을 딴 ‘장진구스럽다’라는 형용사가 유행했을 정도다. 그 외 작품들은 볼 기회가 없었으나 전작 ‘아내의 자격’에서 작가의 한층 섬세하고도 묵직한 노련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밀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대본·연출·연기의 내공이 어우러진 드라마 자체의 흡인력 이외에도 한국판 ‘안나 카레니나’의 탄생을 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잔잔한 흥분마저 느끼게 했다. 금지된 불가피한 연애서사만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상류사회 인간들의 위선과 속물성 내지 비루함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사의 대작들 가운데 수용양상이 지나치게 편향된 작품이라고 생각해 왔다. 실제 사회소설이라고 할 만한 이 작품을 ‘불륜의 운명적 사랑’ 혹은 ‘바람난 귀족부인의 비참한 말로’를 그린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두툼한 분량의 원작보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나는 경우가 많아서일 것이다.
상업적 성공이 중요한 영상화에서 러브스토리 요소가 부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안나 카레니나’가 새롭게 영화화된다면 이번엔 또 얼마나 멋진 선남선녀가 주인공역을 맡을지, 그들이 그 치명적 연애를 어떻게 표현해낼지 우선 궁금해들 할 테니까. 하지만 원작에서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은 갈등의 뿌리이자 골격이긴 해도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노골적인 정사장면도 없다. 톨스토이가 역점을 두고 그려낸 것은 오히려 그 스캔들을 둘러싼 귀족사회의 반응, 안나-브론스키 커플과는 대조적으로 건전하고 안정적인 키티-레빈 부부의 삶과 이들이 접하는 농민들의 현실이었다. 드라마 ‘밀회’도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감상하면 남다른 무게와 재미를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침 중국 인민화보(人民畵報) 한국어판 월간 ‘중국’ 및 웹사이트에 중국에서 대히트한 한국드라마 관련기사가 많이 보도되던 지난 3월, 손질해야 할 원고들의 신뢰성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검색해 본 화제의 한국드라마 2편의 재생횟수가 각각 15억과 5억을 넘는 것을 보고 전율을 금치 못했다. 시청률 100%라 해도 5000만이 안 될 대한민국에게 참으로 어마어마한 시장의 존재를 새삼 일깨워주는 경이적인 숫자였다.

특히 후자는 중국 최대 연례 정치행사 양회, 그 거창하고 엄숙한 자리에서 위원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최고위 지도자 7인의 한사람에 의해 공식석상에서 거론되는가 하면, TV프로에서 등장인물의 패션이 집중 조명되고 극중 소품이나 음식까지 열풍을 일으키며 패러디 광고카피가 나오는 등 거의 국민드라마 수준이었다(4월, 재생 13억회 돌파). 중국의 정계 문화계 언론계에서 한국대중문화산업의 성공이 화제가 되는 요즘, 당연히 우리가 가다듬어야 할 것은 중국에서 한국드라마가 먹히는 숨은 이유와 향후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자세다.

중국에서 유통되는 여러 외제드라마 가운데 한국제가 단연 인기인 이유는 무엇보다 사회발전단계상 한국과 중국 사이의 정서적 공감대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부분적 때로는 심각하게 엉터리인 중국어 자막에도 불구하고 인기라는 점, 즉 비주얼 내지 OST 중심의 소비가 이뤄지고 있다는 현실은 의미심장하다. 한마디로 중국인들에게 한국드라마는 근사한 포스터나 화보집 혹은 뮤직비디오로서의 측면이 강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잘못됐다는 얘기는 아니다. 화보면 어떻고 뮤직비디오면 어떠랴. 중국에서의 한국 트렌디드라마 인기는 거대한 중산층 및 후보군의 존재와 아직 그 수요에 맞는 드라마의 자체 생산이 어렵다는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드라마를 통해 라이프스타일의 소소한 멋을 모방하는 가운데 다양한 영감을 얻으며 삶에 윤기를 더한다면 중국·한국 피차 좋은 일 아닌가.

따지고 보면 이는 유사 이래 모든 문명 및 문화의 전파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드라마 주인공의 패션·헤어스타일·인테리어·독서목록·식성·취향 등이 유행을 낳는다는 것, 예를 들어 18세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전 유럽에 주인공의 복장이나 실연의 상처에 동조한 자살이 유행했던 것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결국 당대의 인기 문화상품과 소비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시장현상의 일부 내지 그 연장인 것이다.

‘밀회’를 다음 회의(選題會)때 중국인 동료들에게 권할 생각이다. 최근 대박난 그 드라마들이 ‘한쮜(韓劇. 한국드라마)’의 전부는 아니라는 뜻에서, 요컨대 당대 한국사회의 일면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며 중국 사회의 반걸음 혹은 한걸음 밖 미래를 앞서 체험하게 해주는 드라마, 인간성에 대한 깊이 있는 해부, 연애나 결혼 같은 오랜 화두의 진지한 탐색을 신선한 형태로 보여주는 드라마, 뛰어난 예술적 전문성을 겸비한 드라마도 있음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이참에 중국어자막 품질에도 관심이 주어지길 바란다. 기왕 상품이라면 소장가치 있는 상품이 되길 바란다. 작품으로서 평가 받길 원한다면 자막수준은 시급하고도 절실한 과제로 보인다. 원래는 구매자 측 업무겠지만 한국드라마를 ‘눈요기’로 대하는 경우가 많은 고객이다 보니, 그런 상황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수밖에 없지 싶다.
[인민화보 한국어판(www.chinacorea.com) 주편 임명신(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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