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는 16일 사업비 11억5000만원(국비 70%, 시비 30%)을 배정해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시장공관 앞 성곽(86m)을 보수·복원한다고 밝혔다. 시는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비를 교부받는 대로 공사에 착수할 계획이다.
하지만 문화재 시민단체 등은 시장공관 주변이 문제가 아니라 공관 자체를 하루라도 서둘러 이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서울성곽 복원을 위해 경기도로 옮기겠다고 결정한 동대문교회처럼 서울시도 시장공관 이전에 대한 결단을 빨리 내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은 “서울시가 관리 취약지역에 대한 보존과 관리를 등한시 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세계유산 등재를 바라는지 모르겠다”며 “특히 혜화문 일대의 서울시장 공관과 가톨릭대학교 주교관 뒷마당, 낙산 정상의 배드민턴장 등이 3대 취약지역으로 꼽히고 있다”고 말했다.
황 소장은 “서울시장 공관 등은 소수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으로 서울성곽을 찾길 원하는 다수의 시민이 접근할 수 없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며 “최근 동대문 교회가 서울성곽 복원을 위해 120여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이전을 결정한 것과 같이 서울시장이 모범을 보여 이전을 서둘러 진행하고 이어 다른 장소에 대한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유네스코에 본 신청서를 접수할 수 있는 유산은 국가별로 1~2개에 불과하다. 현재 유네스코 잠정목록에 등록된 우리나라 유산은 10여개다. 문화재청은 이 가운데 남한산성 등 3개를 우선 대상으로 지정한 상태며 여기에 서울성곽은 빠져 있다.
서울시는 서울성곽에 대해 문화재청 잠정목록 등록을 신청했으며 결과가 지난 3일 나 올 것이라고 언론을 통해 알린 바 있다. 하지만 문화재청 확인 결과 지난 3일 회의에서 서울성곽에 대한 논의는 없었으며 오는 4~5월경 회의에서 다시 논의될 예정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서울시가 2015년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일을 추진하고 있지만 형평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본 신청서 제출 시 서울성곽을 꼭 추천한다는 보장은 없다”며 “1년에 1개밖에 추천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청 순서 상 3개의 우선 대상보다 서울성곽이 본 신청서 제출과 관련해 후순위 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뒤집힐 경우 우선순위에 있는 지자체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우선 추진 대상은 남한산성, 서남해안갯벌, 백제역사유적지군 등 3개다.
우리나라 유산 중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정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 △조선왕릉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 등 총 10개다.
잠정목록에는 △강진 도요지 △남한산성 △서남해안 갯벌 △염전 △대곡천암각화군 △설악산천연보호구역 △남해안일대 공룡화석지 △중부내륙산성군 △공주·부여역사유적지구 △익산역사유적지구 △외암마을 △낙안읍성 △우포늪 △한국의 서원 등 14개가 등록돼 있다.
서울성곽 터에 자리잡은 혜화동 서울시장 공관. 현재 이곳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입주해 있다. |
◇ 혜화동 서울시장 공관
박원순 시장은 지난달 31일 “입주 전 성곽을 둘러봤으면 공관에 입주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성곽 복원에 걸림돌이 되는 공관에 살면서 다른 건물들을 성곽 복원을 위해 이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관 이전 시기를 임기가 끝난(2014년 6월) 후라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등재를 추진하기 위해 이전을 하는 것은 옳은 결정이지만 시기는 앞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유산 등재 절차는 문화재청 잠정목록 신청->문화재청 회의→유네스코에 잠정목록 신청→인정될 경우 잠정목록 등록→등재 본 신청서 제출→실사→등재 여부 통보 순서다.
때문에 서울성곽을 2015년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서 2013년 2월 잠정목록 등재→2014년 2월 본 신청서 제출→2015년 등재 순으로 일이 진행돼야 한다.
박 시장이 임기 후 시장 공관을 이전하겠다는 것은 본 신청서를 제출한 이후, 실사 기간 중에 보존·관리를 하겠다는 셈인 것이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멸실 구간은 어쩔 수 없더라도 기존에 남아있는 구간에 대해 보존·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유산의 가치를 생각해 봤을 때 문제가 지적되는 곳의 이전 대책 및 관리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서울시 관계자는 “올해 하반기부터 보존·관리 총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시기를 맞추는 부분은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 서울시 차원에서도 2015년 등재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관 이전 시기 논란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박 시장이 임기 후에 공관을 옮기겠다고 한 것은 이전의 필요성에 대한 부분을 언급한 것이다. 시기적인 관점으로만 보지 않길 바란다. 임기 후라는 시점을 놓고 ‘재선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품는 것은 과도한 정치적 해석”이라고 말했다.
서울시가 11억여원을 들여 혜화동 시장 공관 앞에 위치한 서울성곽의 복원공사를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예산을 줄 문화재청과의 최종 협의는 아직 안 된 상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기획재정부와 세부 내역 결정과 관련해 협의가 아직 끝나지 않아 정확한 예산 배정은 언급할 수 없다”며 “기재부 협의가 끝난 후 교부 신청을 받고 이후 교부 요청을 하는 시스템”이라고 전했다.
앞서 박 시장이 공관을 선택할 때 2009년 서울시가 매입한 북촌 양반 한옥 ‘백인제 가옥’도 고려했지만 장소가 너무 크고 관광명소라는 이유로 제외한 것으로 알려졌다.
◇ 가톨릭대학 주교관 뒷마당
가톨릭대학 내 주교관 뒷마당 부근이 도성을 싸고 있어 서울성곽 복원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곳은 이미 사유지가 된 상태여서 일반인 출입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가톨릭대학이 위치한 곳은 고종 때 교육시설 확충 등을 이유로 불하(拂下)한 곳으로 멸실되지 않은 구간이기 때문에 서울성곽 복원에 중요한 위치"라고 전했다.
황 소장은 “주교관 일대를 철거할 필요는 없다. 성곽을 보존·관리할 수 있게 조금의 위치 변동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 주교관 주위의 성곽을 개방해 일반인이 즐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톨릭대가 위치한 곳은 고종 때 무료로 불하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국민들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전 고려 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낙산 정상 배드민턴장
낙산 정상에는 인근 주민들을 위한 배드민턴장이 설치돼 있는데 이 배드민턴장도 서울성곽을 깔고 만들어져 있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서울성곽 주변에 대한 체계적인 보존·관리가 필수적이지만 배드민턴장 일대는 일종의 우범지역으로 전락해 있는 상태라는 것이 주민들 지적이다.
낙산을 자주 찾는 김모씨(43)는 “배드민턴장이 아름다운 유산인 서울성곽을 깔고 있는 모습이라 눈살이 찌푸려진다”며 “이곳에 술을 마시고 추태를 부리는 등의 행동이 잦은데 서울시는 과연 이 같은 문제를 알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배드민턴장 인근(군사적 요충지)에 있던 벌컨포대가 서울성곽 복원 등의 이유로 이전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유산의 가치를 판단한 올바른 결정을 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배드민턴장 역시 이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관계자는 “세계유산 등재 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속적인 보존·관리가 이뤄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잠정목록에 올라온 각국의 문화유산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데 이 부분이 우선적으로 갖춰져야 등재에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