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진 지 20년이 되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남과 북으로 찢어져 이념대립에 몰두하고 있다.
대한민국 안에서도 좌-우, 진보-보수로 나뉘어 극단적인 상호비방과 낙인찍기에 목숨거는 '투사'들이 수두룩하다.
대한민국 헌법은 자유와 평등을 모두 소중한 가치로 규정하고 이의 조화를 시대적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헌법상 국가 좌표인 '복지국가'는 자유와 평등,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조화한 이 시대 가장 합리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반박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멀쩡하게 복지국가를 주창하던 사람들도 막상 자기진영에 불리한 적을 맞딱뜨리면 여지없이 상대방을 극좌 또는 극우로 덧칠해 버리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지난 26일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로 대기업을 견제해야 한다는 요지로 발언한 이 후 재벌을 중심으로 한 경제계와 일부 언론에서 ‘이명박 정부가 기업프렌들리를 포기하고 연금사회주의를 획책한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4.27 분당을 보궐선거도 여지없이 '색깔론'에 휘말렸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일명 '강남좌파·분당우파' 논란과 관련, "우리사회가 자꾸 좌파다, 우파다 가르는 게 큰 문제"라고 말했다.
곽 위원장이 삼성전자 등의 실명을 거론하며 ‘거대 권력이 된 대기업’ ‘기존 아이템에 안주하려는 경영진’ 등 원색적인 발언으로 비판한 것에 대해서는 MB정부가 ‘좌파’인지도 모르겠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공적 연금이 보유한 주주권을 활용해 기업을 뜻대로 하겠다는 것은 '연금사회주의'에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좌파정권인 노무현 정부 초기 유사한 이야기가 거론됐지만 당시 한나라당이 반대해 성사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권혁철 자유기업원 시장경제연구실장은 27일 "현 정부 출범 이후 기업 정책을 분석해본 결과 집권 초기 1년간만 시장 친화적이었고 최근 2년간은 누가 좌파인지 분간을 못할 만큼 반기업 정책이 심했다"며 "친기업 노선으로부터 좌회전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한참 왼쪽으로 가있다"고 말했다.
4.27 재보궐선거에서도 예외없이 이념 대립과 색깔입히기 경쟁이 표면화됐다.
한나당에서는 서울 강남의 일부 좌파성향 주민들과는 달리 분당의 (잘사는) 유권자들은 우파로서의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취지로 우호세력을 끌어당기려고 했다.
한나라당 강재섭 후보는 "민주당 손학규 후보가 말하는 중산층의 변화는 중산층에게 세금 더 낼 준비를 하라는 협박일 뿐"이라며 "20년 정치인생과 저의 모든 것을 바쳐 반드시 좌파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강조해 대놓고 선거를 좌파와 우파의 대결로 몰고 갔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이에 밀릴세라 '좌파 우파로 나누는 것 자체가 큰 문제'라고 항변하고 나섰다.
지난 1월 21일 오후 서울 동작구 사당동 국립현충원 앞에서 종북좌익척결단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종북좌익 척결단 출범식 및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김용갑 한나라당 상임고문은 “좌파우파가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좌파는 진보가 아니라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나뉜다”며 “우파쪽에서는 공산주의가 남한을 공산화한다고 보고 있는 반면 좌파들이 하는 주장은 친일세력이 건국한 나라라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김 고문은 “최근 천안함 사건을 보면 좌파들은 '북한이 했다는 증거가 없다. 누가했냐'고 묻는다”며 “손학규도 천안함 사태 때 보면 좌파인 지 우파인 지 의문을 갖게 하는 인물인데 본인 스스로 좌파우파 논할 게재는 아닌 것 같다"고 비난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북한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고 대치하고 있는 마당에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똑바로 인식하고 안보나 통일정책을 추진해 기준을 잡아야한다”며 "MB가 다른 건 몰라도 대북정책만은 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요즘처럼 뚜렷이 벌어진 때는 없었다. 양극화 화두는 계층, 세대, 지역, 기업, 학력, 정치 등 모든 공적·사적 네트워크로 확대돼 상대적 박탈감을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장동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선거철마다 불거지는 과열 양상에 불신을 넘어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며 “비방과 폭언, 이념 논쟁으로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고 지적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치권은 색깔론을 논하기에 앞서 사회발전을 위해 국민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정책과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쿠시마 원전사태에 따른 '방사능 비'에 대한 공포가 과장된 것은 일부 좌파 단체들의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보수언론 등이 보도하자, 진보언론들은 보수언론이 정부 편들기에 나섰다고 대립해 사회갈등으로 번진바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이 반핵시위에 참가한 사회단체 목록을 열거하면서 촛불집회 때 있던 단체가 지금도 그대로 포함됐다고 비난하자,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은 보수언론들이 논리 없는 주장을 펼친다고 반박했다.
지난달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자본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해, 발언 당사자인 정운찬 위원장이 낙마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교육계에서도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학생들의 혼란으로 직결되면서 현재진행형이다.
진보성향의 교육감이 서울, 경기, 강원 등 대다수 시도에서 당선되면서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과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다.
체벌금지 문제만 해도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등 진보성향의 교육감들은 ‘인권문제’를 들어 체벌을 반대한 반면 이 장관은 간접체벌을 허용해 갈등을 빚고 있다.
고교평준화, 교장공모제 등이 법정다툼으로 번지는 등 교육계 수뇌부간의 '이념전쟁'은 한국교총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으로 번져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천안함 침몰 사건에서도 어뢰를 발사한 자가 누구냐를 놓고 좌파와 우파가 또한번의 장외 전쟁을 치렀다.
한국 진보연대를 비롯한 20여개의 시민단체로 구성된 공안탄압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미근동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안당국은 학생 탄압을 즉각 중단하고, 학술단체 자본주의 연구회에 대한 조작날조 사건에 대해 사죄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
이념 갈등을 다루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 이념 논쟁은 정치적 동원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며, 이 때 실체적 진실성 여부를 넘어 가치판단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념 논쟁이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될 경우 그것은 비생산적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클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기도 한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보다도 우리 사회는 유독 이념 논쟁이 심하게 이뤄진다.
식민지 해방투쟁과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우리 현대사가 갖는 특수성이 이념성향에서도 극단성을 갖게 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우리 사회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은 해방 직후 본격화했다가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파의 괴멸로 일단 잠복기에 접어든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은 20년이상 억제됐던 이념 노출 욕구를 일시에 풀어헤치는 촉발제역할을 했다. 이후 치열한 이념 논쟁이 진행돼 왔다. 이념 논쟁의 '뒤늦은 개화'가 이뤄진 셈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권의 색깔론은 철 지난 낡은 이념논쟁”이라며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정치권의 색깔 논쟁은 우리나라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이 이처럼 낡은 이념논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해방 후 형식적으로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했지만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이 왜곡돼 온 경험이 너무 깊은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불공정한 경쟁과 정경유착, 뇌물과 특혜로 기본가치가 흔들리고 부익부빈익빈 현상의 심화로 '자유' 개념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평등'에 집착하는 좌파가 득세할 수 있는 토양이 배양된 것이다.
송인준 전 헌법재판관은 “자유·평등의 어느 일방만을 절대선(善)으로 고집하는 극우 또는 극좌 세력이나 그러한 주의주장을 양분법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념을 대립되는 정치이데올로기로 단순화해 상대를 제거해야할 적으로 규정하는 흑백논리적 태도는 위험한 정치적 갈등과 대결을 불러일으켜 극심한 사회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처럼 자유와 평등이념 간 때때로 갈등하고 대립할 때 이를 메꿔주는 것은 형제애 내지 박애정신이라 할 수 있다”며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관용하는 정신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