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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그리스의 시키온이란 도시에 사는 옹기장이 부타데스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 딸은 이웃의 한 청년과 사랑했는데 어느 날 청년과의 이별을 앞두고 슬퍼하던 차에 불빛에 비친 청년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운 것을 보고 그 윤곽을 따라 선을 그어 그림을 남겼다. 플리니우스가 미술의 기원으로 전하는 잘 알려진 이 이야기는, 회화의 시원은 그림자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림자와 회화의 관련은 예술적 재현의 역사를 특징짓는다. 그러고 보면 사실상 회화 이미지는 애정 관계에서, 헤어짐에서, 대상의 떠남에서, 떠난 대상을 기억하려는 마음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재현이라는 것은 대체물, 즉 대용물이 된다는 형이상학적 특성이 드러나기 때문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의 실제 그림자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를 따라다니며 변하겠지만, 벽에 그려놓은 그의 그림자 이미지는 움직임 혹은 헤어짐과 떠남을 반대하는 추억의 기념물,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따라서 깊은 그리움과 절실한 위로를 주는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실제 그림자는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다닌다. 그래서 미술사학자 빅토르 스토이치타(Victor I. Stoichita)가"하지만 그 사람의 윤곽선은, 일단 벽에 그려지면 그대로 영원히 이미지의 형상으로 존재를 불멸화하며, 순간을 포착한 뒤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다"고 했나 보다.
'그림자'는 곽남신(1953~)이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 말부터 지속적으로 주목해 온 주제다. 작가의 초기작인 '그림자-한 줄기 바람 되어'(198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작품)는 미풍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형상을 세 개의 화폭 위에 담담하게 담아낸 작업이다. 담벼락에 옅은 농도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한옥 창호지 문에 비친 풍경인 듯 보인다. 92×220cm 사이즈의 그림은 그림 앞에 멈춘 관람객에게 어떤 사랑, 헤어짐, 그리고 무수한 기억 등의 묻어뒀던 여러 감정을 일깨운다. 여기서 곽남신의 '나무 그림자'는 나무의 실체를 반영하면서도 그 존재를 갖지 않는, 즉 부재와 존재라는 주제(신체의 부재와 그 투영된 형상의 존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회화적이며 그 본질에 기초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부재와 존재라는 그림자의 이러한 관계의 변증법은 곽남신의 작업을 관통하는 의미 중의 하나일 수 있다. 1970년대 모더니즘 물결이 휩쓸었던 시절에 미술대학을 다녔던 곽남신은 자신이 쓴 책에서 "빛의 유혹에 멋대로 늘어나고 제풀에 줄어드는 걷잡을 수 없는 형상, 사라질 듯 말 듯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자는 생성과 소멸의 모서리에 서 있습니다. 어떠한 회화적 트릭도 실체도 없지요"라고 고백한 바 있다.
곽남신과 앞서 언급한 플리니우스가 전하는 신화를 통해, 회화, 즉 예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부타테스의 딸과 곽남신이 '그림자를 그렸다'라는 것은, 부재와 존재, 생성과 소멸의 사이에서 관계의 변증법을 향한 절절한 마음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현대미술, 요즘 미술이 어렵다고들 한다. 모두 나, 너, 우리 이야기임을 상기해 보면 요즘 미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큐레이터·상명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