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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사 시대의 고도 문명이 있었을까?
1만2600여 년 전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남동부에서 괴베클리 테페의 거석(巨石) 구조물을 만든 지구인들은 수렵채집인들이었다. 고고학적으로 말하면 그 거대한 구조물 역시 농경 발생 이전의 선(先)토기 신석기(Pre-Pottery Neolithic, PPN) 문화에 속한다. 문제는 범부의 상식에 비춰봐도 괴베클리 테페의 구조물은 신석기 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진화된 문명(文明, civilization)의 흔적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대체 어떻게 농경에 진입하지도 못한 태고의 원시인들이 그토록 거대한 돌을 깎고, 그토록 정교한 문양들을 그 돌 위에 새겨서, 그토록 신비로운 원형의 신전(神殿) 혹은 천체 관측소를 구축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역사학의 일반론에 따르면, 선토기 신석기 문화를 일군 사람들은 많아야 수백 명 단위의 작은 집단을 이루고서 짐승을 사냥하고 열매를 따고 뿌리를 캐며 살아가는 원시 공동체의 성원들이어야만 한다.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면서 지구인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문자를 제정하고, 정부를 세우고, 사회적 분업을 이루며 문명인으로 진화했다는 견해가 이미 일반 지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역사 발전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의 단선적 상승 과정이라 설명해 온 인류의 뿌리 깊은 발전 사관인데, 근대 역사학의 태동기부터 이러한 관점은 인류의 고정관념이 되어버렸다.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은 바로 그러한 현대인의 고정관념을 산산이 조각내고 있다. 최소한 1만2500여 년 전에도 수렵채집인들은 이미 정교한 천문학적 지식을 축적하고 고도의 석공 기술을 갖춘 문명인의 삶을 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진정 그러하다면 오늘날 지구인이 망각해 버린 선진 문명이 수만 년 전에 지구의 어딘가에 존재했을 가능성도 전면 배제할 수가 없다. 실제로 태고의 선진 문명이 있었다는 가설 위에서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선사 시대 유적지에선 고도의 석공 기술로 마련된 웅장하고도 정교한 거석 구조물이 다수 보인다. 그 유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구나 진정 인류의 기억에서 삭제된 태고의 고도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었나 하는 강력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 인도네시아 구눙 파당, 태고 문명의 유적인가?
인도네시아 자바 서부의 카리아무크티(Karyamukti)에 위치한 태고의 피라미드 구눙 파당(Gunung Padang)이 대표적이다. 높이 95미터의 언덕 위에는 거대한 육각형의 안산암(安山巖) 돌기둥들이 무수히 쌓여 있다. 그 거대한 돌 더미를 처음 발견했던 19세기 유럽의 탐험가들은 이미 구눙 파당이 4단의 테라스를 가진 역사적 유물임을 이미 간파했었다. 그럼에도 구눙 파당은 1970년대까지 학계의 관심을 벗어난 채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최근에야 학계에선 구낭 파당의 꼭
대기뿐만 아니라 축구장 28개만큼 넓은 15헥타르의 언덕 전체가 여러 시기를 거쳐 단계적으로 구축된 피라미드 구조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2023년 10월 인도네시아 지질학자 대니 힐만 나타위쟈자(Danny Hilman Natawidjaja)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고고학 논문에 따르면, 구눙 파당은 길게는 2만8000년 전까지 소급되는 인류 최초의 피라미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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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 동료 심사를 통과해서 발표됐던 논문이 사후적으로 철회 조치는 흔치 않다. 설령 오류가 발견됐다 하더라고 정정 요구를 하면 된다. 그럼에도 고고학계가 이 논문을 철회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그 주장이 기존 고고학계의 정설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만큼 혁명적이었음을 말해준다. 나타위쟈자 교수의 논문이 타당하다면, 기자 피라미드보다 길게는 2만3000여 년 앞서는 피라미드가 인도네시아 자바에 이미 건설되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류가 알지 못하는 태고의 선진 문명이 존재했다는 직접적 증거물인 셈이다. 이 주장이 타당하다면 지금껏 쌓아 올린 고고학의 일반론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당연히 기존 학계는 논문 철회라는 비상조치로 일반론의 붕괴를 막아야만 했다. 물론 나타위쟈자 교수는 논문 철회 결정에 반발하여 공식적인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구눙 파당을 둘러싼 학계의 논쟁은 현재 진행 중이다. 어떤 이는 기존 학자들이 학계의 일반론을 지키기 위해서 직업적인 연대를 하고 있다며 고고학계의 보수성을 비판한다. 어떤 이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엉성한 이론을 마구 지어내서 과학을 우롱하고 있다며 섣부른 "음모론"을 경계한다. 현재로선 그 누구도 어느 쪽의 편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학문적 진실은 언제나 대립하는 이론들의 변증법적 상호 침투를 통해서 밝혀지기 마련이다. 지금껏 알려
진 학계의 정설이 앞으로도 불변의 진리로 남으리라 믿는다면 지적 나태를 피할 수 없다.
모든 통념은 시효성을 갖는다. 새로운 증거가 드러나고 기존의 이론이 설명력을 잃게 되면 사회적 통념은 바뀔 수밖에 없다. 통념은 일단 무너지면 급속하게
새로운 통념으로 교체된다. 지구인들은 고정관념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지만, 고정관념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엔 한 치의 미련 없이 진실이라 여겨지는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인다. 불과 500년 전만 해도 지구인 99.9%는 지구 중심의 천동설을 진실로 믿고 있었다. 1543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6권을 출판한 이후에야 지구가 태양 주변을 공전하고 있음이 점차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현재로선 외계인 미도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지동설이 지구인의 상식을 허물게 될까요?" <계속>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