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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리 부상으로 올림픽에 못 갔다.
"대학교 때 올림픽 대표로 뽑히고, K리그 구단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연습 때, 평가전 때 연속해서 허리를 다쳤다. 사실은 그전부터도 허리가 좀 안 좋았다."
- 그래서 K리그를 못 갔나.
"올림픽 앞두고 허리 부상으로 4개월 쉬다 보니 제 기량이 안 나왔다. 스카우트 사이에서도 쉽지 않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 재활은 어땠나.
"솔직히 당시는 재활에 대한 개념과 실력이 좀 떨어졌다. 그래도 나름대로 재활을 잘해서 대학 마지막 대회인 추계선수권 때 동국대가 30년 만에 우승하는데 기여했다."
- 올림픽 못 나갔을 때 심정은.
"올림픽 대표팀 지정병원인 일산 백병원에 입원해서 치료하고 재활했다. '이것이 내 운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제 일만 열심히 했다. 지금 못 나갔다고 좌절할 나이도 아니었다. 그다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그때 일본에서 오퍼를 받았나.
"젊었을 때였으니까 회복이 빨랐다. 제가 부활했다고 하니까 K리그, 리그에서 제의가 많았다. 제프 이치하라와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지성이가 뛰는 교토 퍼플상가에서 또 연락이 왔다."
- 당시 제프 이치하라는 1부, 교토 퍼플상가는 2부로 막 강등된 상태였다. 2부리그 팀을 택한 이유는.
"교토에는 어찌 됐든 지성이가 있었고, 젊은 선수 위주로 리빌딩 작업을 한다고 했다. 비전이 마음에 들어 고민고민하다 선택했다."
- 그 해 말에 팀이 1부로 승격했다. 2003년 1월 1일 천황배 우승도 했다. 박지성 선수가 12월 31일로 계약기간이 끝났고 다리를 다쳤는데도 뛰었다는 전설의 경기다.
"천황배 결승은 못 뛰었다. 부상 때문이다. 그 시즌에 정말 잘했는데 또 허리를 다쳐서 수술을 했다."
- 그래서 대표팀에 못 가고 월드컵에도 못 나갔다.
"맞다. 월드컵 탈락은 올림픽 때와는 마음이 다르더라. 대한축구협회에서 공문이 왔고, 오늘 경기하고 다음 날 소집이었다. 지성이랑 한국 같이 가려고 비행기표도 다 끊어놨는데 감바 오사카와 경기하다 허리를 또 다쳤다. 한번 다친 부위를 또 다친 거라서 귀국을 못 하고 바로 병원으로 가서 수술받았다."
- 불운했다.
"참 안타까운데, 제가 관리를 못했다. 그때 몸이 너무 좋아서 날아다녔다. 일본에서 유명한 팀들이 저를 스카우트 하려고 매 경기 왔고, 오라는 데가 아주 많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감도 있었고 플레이도 좋았다. 그래서 월드컵도 나갈 줄 알았다. 다친 다음에는 좀 좌절하기도 했다."
- 병원에서 월드컵을 본 심정은.
"감정이 교차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제가 좋아하는 동료들이 되게 많았으니까, 김남일, 박지성 선수나 안정환 형처럼 좋아하고 친했던 선수들이 잘해서 기분 좋았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고통이 심했기에,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 교토에서 박지성은 어떤 선수였나.
"행복한 선수였다. 교토에서 이룰 것 다 이뤘으니까. 젊은 선수들이 무서운 게, 자신감 붙으면 누구도 잡을 수가 없다. 지성이는 실력이 단계를 밟아가는 게 아니라, 월드컵 끝나고 완전히 다른 선수가 돼서 돌아왔다. 경기를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느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지성이는 진짜 열심히 해서 자기가 그 운을 찾은 경우다."
- 한국에 와서는 여러 팀을 굉장히 옮겨 다녔다. 이유가 있나.
"2003년 부산으로 왔다. 재활을 1년 이상 해야 했다. 일본에서 6개월 만에 복귀했는데 요코하마 마리노스와의 경기에서 딱 30분 만에 다시 주저앉았다. 축구를 그만두려고 했는데 마침 부산 아이파크에서 연락이 왔다. 1년 재활 기간 보장해 줄테니 계약하자고 했다. 부산에서 저를 많이 도와주셨다. 저 때문에 개인 트레이너를 영국에서 초빙할 정도였다."
- 부산에서 2년 지내고 수원 삼성으로 갔다.
"부산에서 1년 재활하고 그다음에 몸이 올라오니 여러 팀에서 제안이 왔다. 수원에서 차범근 감독님이 직접 연락을 주셨다."
- 고등학교 때 처음 허리를 다쳤을 때 완벽하게 치료했다면, 하는 후회는 없나.
"그런 생각도 있지만, 저희 집안 가족 병력이 있다. MRI 찍어봤는데 허리가 약간 기형 아닌 기형이었다. 꾸준히 관리하면서 했었야 하는데 그때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 K리그 네 팀을 거쳐 다시 일본을 갔다가 싱가폴, 인도네시아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저는 스피드, 기술로 볼을 차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 근육 부상이 많아졌다. 2009년 4월 전남에서 요코하마로 이적했는데 처음엔 잘해서 2년 재계약을 했다. 12월에 감독이 바뀌면서 팀 내 입지가 줄어들기에 싱가포르에 있던 이임생이 형과 연락이 닿아 동남아로 갔다. 만 32세 때다."
- 싱가포르에서 또 허리를 다쳤다.
"첫 경기였다. 그래서 계약 해지하고 한국 들어왔다. 은퇴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전화가 왔다. 2년 6개월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재미있게 공을 찼다. 관중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고 열기가 대단했다. 비로소 축구를 보는 눈이 뜨이는 느낌이었다."
- 어떻게 눈이 뜨였나.
"은퇴할 때가 되니까 축구가 보이더라. 쉽게, 편하게 하는 축구. 심플 이즈 뷰티플(simple is beautiful)이었다."
- 동국대 감독으로서 꼭 하고 싶은 일은.
"왕중왕전 포함해서 한두 개 정도 더 우승을 하고 싶다."
- 선수들한테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선수들 개인이 빛났으면 좋겠다. 팀보다 개인이 빛나도 좋다. 축구는 11대 11 단체 경기다. '원 팀'이 물론 중요하지만, 승부처에선 개인이 결정지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개인 운동 많이 하라, 볼 뺏겨도 좋고 실수해도 좋으니까 으니까 자신 있게 하라고 주문한다. 주눅 들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해라."
- 2022년 덴소컵 대학선발팀 감독으로 한일전에 나섰다.
"대표팀 포함해서 한일전 5연패 중이었다. 그래서 책임감이 막중했다.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일본 스타일을 잘 알았기에 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부담감보다는 그 긴장감을 즐겼다. 그래서 좀 좋은 결과가 나지 않았나 생각한다."(2022. 9. 17. 안양종합운동장, 3-2 승)
- 지도자로서의 꿈이 있다면.
"지금도 일본,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축구 관계자들과 연락하며 지낸다. 외국에서 나가서 지도자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마지막 목표는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말씀드리지 않겠다. 실현이 되면 그때 말씀드리겠다."
▲ 안효연은
부평고, 동국대를 거쳐 교토 퍼플상가(2001~2002). 부산(2003~2004), 수원(2005/2007~2008), 성남(2006~2007), 전남(2009), 요코하마(2009)에서 활약했다. 홈 유나이티드(싱가포르 2010)를 거쳐 페르셀라 라몽간, 빈탕 메단, PSMS 메단, 람빵 FC 등 인도네시아 팀에서 5년 간 뛰었다. 올림픽 대표로는 21경기 출전 5골, 국가대표로는 14경기 출전 6골을 기록했다. 용호고 코치를 거쳐 2018년부터 모교 동국대학교의 지휘봉을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