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단재 선생 기념 사업에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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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 여사는 귀국 직전까지 베이징에서 무려 17년 동안이나 활동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중국 내에 지인들이 상당히 많다. 대부분 독립운동과 관련 있는 일을 하는 이들이다. 의기상통한 탓이었는지 이들 중 몇몇과는 거의 가족처럼 지내기도 했다. 재중 항일역사기념사업회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정원순 베이징 보보여행사 사장도 이중 한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때로는 딸처럼, 때로는 동지처럼 막역하게 지낸 것으로 중국 내에서는 유명하다. 정 이사장으로서는 몹시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잠시 슬픔을 뒤로 하고 우선 본보에 고 이 여사를 추모하는 글을 보내왔다. 다음은 정 이사장의 너무나도 절절한 추모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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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참고 또 참으려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그러나 잠시 눈물을 거두겠습니다. 돌아보면 여사님의 일생은 오롯이 단재 선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선생께서 너무 아까운 나이에 일제 감옥에서 옥사한 탓에 단 한번도 뵌 적이 없었다고 하셨지만 아마도 그건 가족 관계를 떠난 어떤 천명 같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 사실은 여사님께서 베이징에 계시면서도 단재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호적 회복 운동을 하신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결국 여사님의 노력으로 인해 단재 선생께서는 겨우 2009년에야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호적을 회복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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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만이 아닙니다. 일제 시대 베이징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중국 내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을 보존하고자 한 여사님의 노력도 그다지 진척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정부의 무관심으로 아예 흔적까지 계속 지워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중국 내 뜻 있는 인사들이 모여 만든 '재중 항일역사기념사업회'가 여사님의 관심과 도움으로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매년 독립운동가 흔적 찾기 답사 교육이 그래도 잘 진행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친일파들의 재산은 국가가 눈 벌건 채 찾아주면서도 단재 선생이 망명 전에 사시던 삼청동 집터에 대한 여사님을 비롯한 후손들의 소유권 주장에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까? 친일파들의 후손들은 첩의 자식들까지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고 독립운동가 선조를 두면 온 집안이 거지꼴이 된다는 역설적인 말은 이제 불후의 진리가 됐다고 해도 좋습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입니다. 여사님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실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그러나 여사님, 이제 모든 근심과 걱정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못 다 하신 일들은 저와 사업회의 홍성림 회장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여사님이 우리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당부라고 생각하면 진짜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여사님, 그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만날 시아버님 단재 선생과 부군께서 아마도 잘 했다고 엄청나게 칭찬을 해 주실 겁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다시 한번 명복을 간절히 빌어봅니다.
재중 항일역사기념사업회 이사장 정원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