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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선각자 ‘함태영 부통령·목사’, 3·1운동 주도한 한국기독교 대표 지도자”…‘송암 함태영’ 평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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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기자

승인 : 2023. 02. 25. 03:17

3·1운동은 대한민국 건국정신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민족운동이다. 짧은 시간 전국을 강타한 민초들의 함성은 강압통치로 서슬퍼런 일본의 위세를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민족대표 33인으로 불리는 이들은 민족의 지도자로 각인되었다. 그런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에서 빠져있었던 인물이 있다. 3·1운동을 진두지휘한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인 ‘송암 함태영’이다.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목사를 재조명하는 송암(松岩) 함태영(咸台永) 평전이 출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장신대학교의 김정회 교수가 집필한 『송암 함태영』(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은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해방 공간,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송암 함태영에 대한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함태영의 생애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생애 전 기간(1873~1964)을 대상으로 한다. 그의 생애는 크게 5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출생부터 1895년 법관양성소에 입학하기 전까지(1873~1895), 제2기는 법관양성소 입학부터 법관으로 살았던 시기로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까지의 생애(1895~1909), 제3기는 기독교에 입교한 이후부터 삼일운동의 시기(1909~1921), 제4기는 목회자로 활동하던 시기(1922~1945), 제5기는 해방 후 정치활동에 참여한 시기(1945~1964)이다. 

송암 함태영은 대한제국기에 최초의 법조인으로 활동했고, 1919년에는 삼일운동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요, 신학사상가, 정치지도자였다. 특히 1945년 해방 이후에 그는 미 군정의 자문기구였던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민주의원으로 활동했고, 초대 심계원장(현 감사원장)을 지냈으며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3대 부통령(1952-1956)을 역임할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1962년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광복후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취임한 분이 이시영(1869~1953년) 선생이다. 김성수 선생은 광복 후 1951년 5월 2대 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출신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 대정과를 졸업(1917년)하고 귀국해 중앙학교 교장이 되고 경성방직(주)을 설립했다.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물산장려운동을 제창하고 보성학교를 인수했다.  

제3대 부통령은 함태영(咸台永) 선생이다. 그는 법관양성소(서울대 법대 전신)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서울법대 동창회 명부에 제1호 회원이 바로 함태영으로 나와 있다. 함태영은 한성재판소 검사로 재직 중 1898년 독립협회 사건 관련자 이상재 선생 등 17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이승만은 한성감옥에 투옥됐으며 그후 탈옥했다. 이승만은 다시 체포되어 탈옥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처음으로 회심을 경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함태영은 사형이 불가피한 이승만을 도왔으며 결국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에 동감하고 있던 함태영은 “유망한 청년들에게 사형은 부당할 뿐더러 가볍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파면을 당하고 말았다.

주로 인물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해 온 저자 김정회 박사는 이 책의 집필 이유에 대해서 “함태영은 언제나 역사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주변인으로 취급받아왔다. 그렇기에 기존에 그나마 나온 연구들도 함태영의 삶을 누군가의 주변에서 찾으려 했다. 평전조차 기록되지 않았던 이유도 철저하게 그의 생애가 저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담긴 평전이 필요했던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의 생애를 보다 역사적이고 사상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만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위치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저자는 격동과 시대적 변혁의 시대를 거치며 지식인, 신앙인이자 정치인의 길을 걸어야 했던 한 인간의 모습을 따라가며 그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이라는 역사의 무대를 관통할 수 있었는지를 찾으려 했다. 

법관이 된 이후부터 함태영의 내면에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의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위민국가(爲民國家)의 이상이었다. 기울어져 가는 국가의 모습 속에서 참된 근대적 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그의 열망은 근대 법학을 배우면서 싹이 트기 시작했다. 

국권이 침탈되는 과정에서 좌절되었던 국가의 이상은 기독교를 만나면서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함태영은 1909년 대심원 판사 시절 재임중 골육종(뼈암)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결국 위중한 상태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원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로 병이 낫는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연동교회에 출석했다. 함태영은 병이 치유되는 그 순간 초월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했다. 절망과 고통의 끝에서 얻은 구원의 기쁨이었고 은혜였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국가의 관계를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하지 않았다.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왼쪽). /사진=김정회 교수 제공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이 있다. 그것은 3·1운동의 기획부터 참여했던 함태영의 행적이었다. 남강 이승훈과 함께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지도자였던 함태영은 천도교의 최린과 함께 이 3·1운동의 성격과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기획했다. 

함태영은 3·1독립선언서 작성을 주도하다가 마지막 서명 단계에서 빠졌다. 민족대표들이 투옥되면 그들의 가족을 돌보고 후사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기독교계를 하나로 이끄는 설득의 작업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1919년 3월 2일 3·1운동의 주도 인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엄중한 조사와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최고형인 3년형을 언도받았다. 1919년 7월 서대문형무소 투옥 상태에서 2심 재판을 받고, 1919년 10월 30일 3심에서 출판물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1921년 12월 23일 투옥된 지 2년 만에 가출옥으로 석방됐다. 1921년 12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특히 함태영은 1947년 1월 서울 인현동에 기독교흥국형제단본부(基督敎興國兄弟團本部)와 함께 조선농민복음학교를 설립했다. 농민복음학교는 그해 4월 7일에 개교했다. 함태영은 농민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기독교 복음의 가치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신앙운동을 전개했다. 농민복음학교는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해 필수과정으로 개설된 기독교흥국형제단의 교육기관이다.

함태영은 “조선이 사는 길은 조선 농촌이 사는 길이 있다. 농촌을 살리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을 뿐이다. 십자가를 지고 농촌을 개척할 젊은이들은 이 학교로 오라. 우리의 불같은 리론과 하나님의 뜨거운 능력으로 연마하여 우리는 각기 한 촌락으로 드려가자”고 강조했다.

      서대문 형무소 투옥 당시의 수형표 / 사진='송암 함태형' 194페이지
이 책은 저자가 함태영의 개인 저작물과 105인 사건과 3·1운동의 신문조서, 한국기독교 역사 자료, 일본의 한국인 사찰자료 등 수많은 자료들을 토대로 연구하고 정리한 결과물이다. 

김정회 박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장신대학교에서 석사와 철학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목사(채움교회)로 서울장신대학교와 숭실사이버대학교에서 외래교수로 한국교회와 기독교의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 기획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연구위원과 월남시민문화연구소 연구위원(종교분과), 한국시민문화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와 논문으로는 『송암 함태영』(연세대출판문화연구원, 2022), 『한국기독교의 민주주의 이행연구』(해위 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 2017), 공저로 『해방공간과 기독교 1』(도서출판 선인, 2017), 『해방 후 한국 기독교인의 정치활동』(도서출판 선인, 2018), “함태영을 통해서 본 삼일운동과 기독교의 관계”(한국정치외교사논총, 2018년 2월호) 등이 있다. 

한편 함태영 부통령의 아들 함병춘(1932~1983) 박사는 국제법의 권위자로 연세대 교수를 지냈으며, 주미 대사와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학자·정치가·외교가였다. 그는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미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50명의 명사(名士)에 꼽힌 인재였으나, 1983년 아웅산 테러 때 51세에 순국했다. 손자 함재봉(1958년생) 박사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거쳐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한국학술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미국 칼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함태영 부통령의 비서를 지낸 서효근 목사는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함 부통령의 영향을 받아 고통과 고난으로 방향을 잃은 어려운 농촌을 살리기 위해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해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선 선구자이다. 가나안농군학교는 대한민국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효근 목사는 가나안농군학교가 자립하게 될 때 어려운 농촌 현장으로 사역지를 옮겨 교회를 개척하며 농촌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교회가 부흥이 되면 다시 다른 농촌으로 이동해 전북 무주군 안성면에 소재한 이목교회 등을 개척했다. 그는 가난하고 힘든 농촌의 7개 교회를 개척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김범일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세계가나안농군학교 운동본부 명예총재)은 2020년 8월 15일 서울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SDC인터내셔널스쿨 졸업예배'에서 “서대천 SDC인터내셔널스쿨 이사장(홀리씨즈교회 담임목사)의 선친 서효근 목사는 저의 아버지 김용기 장로와 함께 기독교의 청교도 정신으로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해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서효근 목사는 함태영 대한민국 부통령의 비서로 함 부통령으로부터 국정 철학을 배웠다. 그 당시 서효근 비서는 주일날 청년들을 지도했던 새문안교회 전도사였다”며 “그 당시 그는 새문안교회에서 선친인 김용기 장로를 만나 ‘농촌계몽을 통해 농촌을 변화시키자. 농촌이 잘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는 것을 서로 공감하며 6·25전쟁 후 폐허가 된 농촌을 살리는 운동에 매진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가석방되는 함태영(오른쪽에서 두번째) - 1921년 12월 23일 동아일보 / 사진='송암 함태형' 196페이지
안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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