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의 기후와는 상관이 없이 지루한 겨울을 나며 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에서는 이때 이미 봄을 맞고 있다. 봄은 감각으로보다는 기다리는 마음으로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춘’이라는 말에, 그리고 조금은 성급하게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에 반가움이 앞선다. 감각으로는 아직 추위가 남아 있는 겨울이지만 마음으로는 화사한 매화와 함께 봄날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무렵부터 추위도 그냥 추위가 아니라 봄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라고 부른다.
입춘은 문자 그대로는 봄이 시작된다는 뜻이지만 실제로 봄을 느끼기에는 아직 겨울 기운이 꽤 많이 남아 있는 때다. 동짓날로부터 세 개의 절기 즉 약 45일이 지난 시점이고 낮에는 햇볕도 상당히 따뜻하기는 하지만 그동안 축적된 한기와 아직은 한파를 몰아오는 시베리아 기단의 위세가 가시지 않아 ‘입춘한파’ ‘입춘 거꾸로 붙였나’ ‘입춘 추위 김장독 깬다’ 또는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는 말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때 흔히 매서운 추위가 몰려와 다가오는 봄을 시샘하기도 한다. 이 무렵에는 동장군(冬將軍)의 심술이 꽤나 고약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입춘이 되었다고 해서 따뜻한 봄이 된 것으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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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부터 산골짜기에는 여러해살이풀인 앉은부채가 언 땅을 뚫고 올라와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고 산과 들에는 냉이, 꽃다지, 쑥 등의 이른 봄나물들이 돋아나 있다. 이 작은 것들이 추위를 뚫고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용맹한 봄의 전령사들이다. 이때쯤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에는 한겨울부터 수줍은 듯 나뭇잎 속에 숨어서 피고 지는 동백의 새빨간 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춘란(春蘭)으로도 불리는 보춘화(報春化)와 수선화도 그 뿌리에서 꽃대가 나와 꽃이 핀다. 그리고 본래 따뜻한 남녘에서 잘 자라지만 꽃은 추위 속에서 피워내는 매실나무에도 입춘 추위 속에서 단아한 매화가 벙글기 시작한다.
예부터 입춘이 드는 날 입춘이 드는 시간에 집의 대문이나 기둥이나 대들보에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었음을 자축하며 한 해의 행운과 건강과 복을 비는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봄이 되니 크게 길하고 따뜻한 기운이 도니 경사가 많으리라)과 같은 글귀를 쓴 입춘방(立春榜)을 붙이는 세시풍속이 있다. 입춘에는 입춘 절식이라 하여 움파, 부추, 마늘, 달래, 무릇, 유채, 멧갓, 당귀 싹, 미나리 싹 등의 시거나 매운 푸성귀 가운데 오방색(五方色·오행설에 따라 동쪽은 파랑, 서쪽은 하양, 남쪽은 빨강, 북쪽은 검정, 가운데는 노랑의 다섯 가지 색깔)이 나는 다섯 가지로 ‘입춘오신채(立春五辛菜)’라는 자극적인 생채요리를 만들어 먹음으로써 새봄의 미각을 돋우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