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 동백나무숲. 떨어진 꽃잎이 붉은융단처럼 깔렸다. 사위 고요한 숲에서 3월말까지 화사한 동백꽃을 볼 수 있다..
봄에는 고실고실한 흙길을 밟으며 걸어봐야 한다. 발바닥에서 전해지는 폭신함이 마음을 참 평온하게 만든다. 고운 볕이 잔뜩 내려앉은 바닷가를 걷는 일도 좋다. 뭍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어찌나 맑은지 듣고 있으면 몸이 절로 깨끗해진다. 이 길에서 얻은 짙은 여운이 한해를 버틸 힘이 된다. 전남 강진에서 이런 길들을 찾아 걸었다.
여행/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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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정약용은 18년의 강진 유배생활 중 11년을 이곳에서 머물며 약 600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여행/ 백련사 일주문 동백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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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이어진 길에 동백나무가 울창하다.
◇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전남 강진 도암면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을 찾아간다. 여기서 백련사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 걷는다. 1km 남짓한 길이라 게으름 부리며 걸어도 1시간이면 완주할 수 있다. 길이가 짧다고 그럭저럭 볼 길은 아니다. 첩첩산골 숲길 못지않은 운치가 있다. 언덕을 넘어야 하지만 겁먹지 않아도 된다. 봄의 길목에선 동백꽃의 달콤한 향기가, 또 봄이 질펀하게 내려앉았을 때는 풋풋한 차향이 수고를 덜어주니 걷기가 편하다. 이토록 고상한 멋을 즐기려고 멀리서 애써 찾는 이들이 참 많다.
이 길은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이 다산초당에 머물며 당시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를 만나러 가던 길이다.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학문과 사상을 논하고 차(茶)를 즐기며 다도를 이야기했다. 예쁘고 사연 많은 이 길은 ‘한국의 걷고 싶은 길 10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다산초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귤동마을을 지나야 한다. 귤동마을에서 다산초당으로 향하다보면 울퉁불퉁한 나무뿌리들이 발에 밟힌다. 대지의 힘줄처럼 땅 위로 불거진 원시의 이 모습에 시인 정호승이 반했다. 그는 이 길에 ‘뿌리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산초당에서는 툇마루에 앉아 고립을 누려본다. 다산은 18년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 가운데 11년을 초당에서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해 무려 600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고립과 단절은 위대한 사상을 잉태할 수 있다. 현실 정치에서의 실패가 그의 철학과 이상을 완성시켰다. 지금의 세상에서도 그렇다. 이러니 고립은 궁극적인 실패는 아니다.
초당 주변에는 다산의 흔적(다산4경)이 오롯하다. 곱씹을수록 애틋해 가슴 먹먹해지는 풍경들이다. 다산은 앞마당의 너럭바위(다조)에 솔방울로 불을 피우고 초당 뒤 샘물(약천)을 길어 찻물을 끓였다. 바닷가에서 돌을 주워 초당 옆 연못 가운데 탑(연지석가산)을 쌓았다. 탑이 높아질수록 형(정약전)에 대한 그리움도 커졌다. 당시 형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산은 유배가 끝나자 초당 옆 비탈 큰 바위에 자신의 성인 ‘정(丁)’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이곳을 떠났다. 수식이 없는 글자는 군더더기 없는 그의 성품과 닮았다.
여행/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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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체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조선시대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가 썼다.
백련사로 향할 때는 천일각, 해월루는 챙겨 들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의 풍경이 장쾌하다. 다시 조붓한 숲길을 따라가면 백련사가 나온다. 백련사는 고려시대 불교개혁운동인 백련결사의 진원지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각각 8명의 국사와 8명의 종사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백련사에서는 대웅보전은 꼭 본다. 웅장하면서도 단청 빛깔이 참 곱다. 대웅전 현판 글씨는 조선시대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가 쓴 것이다. 글씨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힘이 압권이다.
부도탑이 늘어서 있는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51호)에는 동백꽃 향기가 은은하게 흐른다. 수령 500~800년 된 약 7000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바닥에는 꽃잎들이 융단처럼 깔렸다. 올해 백련사 동백꽃은 유난히 붉고 싱싱하다. 백련사 일주문에서 경내로 드는 진입로에도 동백꽃이 지천이다. 볕 받아 붉게 오글거리는 꽃잎이 길을 밝힌다. 동백은 11월에서 이듬해 5~6월까지 피고지기를 반복한다. 백련사 동백은 3월말까지 가장 화사하다.
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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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원림에도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어도 예쁜 꽃이 동백꽃이다.
◇ 백운동 별서정원·가우도
백운동 별서정원과 가우도 해안길도 메모해 둔다.
전남 강진 성전면의 백운동 별서정원에도 봄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별서정원은 전원이 산속 깊숙한 곳에 만들어 놓은, 일종의 별장 같은 집에 딸린 원림(집터에 딸린 숲)이다.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는 세속의 벼슬이나 당파싸움에 야합(野合)하지 않고 자연에 몸을 의지하기 위해 백운동에 예쁜 원림을 조성했다.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전남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과 함께 ‘호남의 3대 원림’으로 꼽힌다.
동백나무숲과 비자나무숲이 울창한 오솔길을 지나고 계곡을 건너면 원림이 나타난다. 세속과 단절된, 오래된 숲은 숨 멎을 듯 경건하다. 사위가 고요하니 숲에서는 바람소리, 새소리가 우레처럼 크고 또렷하게 들린다. 백운동 뒤로 솟은 월출산 봉우리는 우뚝하고 강건하다. 선조들은 자연을 집 안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며 즐겼다. 백운동의 무구한 자연에서 이런 지혜를 본다.
백운동의 우아한 풍경은 숱한 묵객들의 애를 태웠다. 이들은 백운동에 관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오래도록 여운을 즐겼다. 다산도 그랬다. 강진 유배생활 중 제자들과 함께 이곳을 다녀간 그는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 그림을 그리게 하고 12개의 멋진 풍경을 담은 시도 짓게 했다. 그리고 이를 엮어 ‘백운첩’이라는 시첩으로 남겼다.
여행/ 가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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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도. 강진만 바다가 봄 볕을 받아 반짝인다. 뒤로 보이는 것이 육지와 가우도를 연결하는 망호 출렁다리다.
여행/ 가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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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도에는 섬을 에두르는 생태탐방로가 잘 조성돼 있다. 한두시간이면 섬을 한바퀴 돌 수 있다..
가우도는 강진만 한 가운데 위치한 섬이다. 전남 강진은 8개의 섬을 품었다. 이 가운데 유일한 유인도가 가우도다. 13가구 33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 몸 붙이고 살아간다. 섬이지만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2개의 출렁다리(저두·망호 출렁다리)로 뭍과 연결돼 있다. 차는 못 들어간다.
섬을 에두르는 2.5km의 탐방로(함께해(海)길)가 잘 조성돼 있다. 1시간쯤 걸으면 섬을 한바퀴 돌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강진만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니 어디서든 바다와 펄을 볼 수 있다. 걷고 싶은 만큼 걸어본다. 볕 받아 오글거리는 바다를 보면 눈이 상쾌해지고, 말랑말랑한 개펄에 시선을 주면 마음까지 순해진다. 불과 한 두 시간이면 끝날 여정인데 긴 여행하듯 속도를 늦추니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무심코 스쳐 지나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면 ‘힐링’에 성공한 거다. 이런 가우도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17-2018 한국관광 100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나만 더 추가하면, 가우도 정상에서 저두해안으로 이어지는 집트랙은 한번 타 본다. 강진만의 장쾌한 풍경을 바라보며 스피드까지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