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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100세 시대] “80년간 친 정구, 100살까진 해야지”

[희망 100세 시대] “80년간 친 정구, 100살까진 해야지”

기사승인 2012. 12. 04.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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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찬 인생 정구 마니아 노원태 할아버지
정구 마니아 노원태 할아버지가 지난달 27일 서울 충정로 부근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조준원 기자 wizard333@

아시아투데이 조한진 기자 = 서울의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져 사람들이 한껏 옷깃을 여미고 다니던 지난달 27일. 야구 모자를 쓴 점퍼 차림의 한 노인이 정구 라켓을 어깨에 메고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온 그는 “안녕하세요. 노원태 입니다”라며 밝게 인사를 건넸다. 똑 부러지는 그의 말투에서는 절도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1922년생, 우리 나이로 91살인 노원태 할아버지는 80년 넘게 정구를 치고 있는 정구 마니아다. 지난해에는 ‘어르신 체육대회’에 출전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서울 충정로의 한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눈 노 할아버지는 거침없는 언변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특히 환한 얼굴에 스며있는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정구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더 밝아졌다. 유년 시절 조부가 운영하던 정비소 공장에서 새끼줄을 쳐놓고 치던 정구는 노 할아버지 삶의 소중한 일부분인 듯했다. 헌병대 대령으로 예편한 노 할아버지는 육군 테니스부장을 거쳐 전역 후 대한정구협회 전무이사까지 지냈다.

“요즘에는 테니스를 많이 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정구 밖에 없었어요. 운동을 하면 마음이 상쾌해지고 잡념이 없어져요. 처음에는 건강보다는 취미로 시작했죠. 그런데 정구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고 아직까지 치고 있네요.”(웃음)

야외 활동을 하기에 춥게 느껴지는 요즘도 노 할아버지는 매주 1~2회씩 서울 삼성동 봉은사 인근 정구코트에서 ‘100세 정구클럽’ 회원들과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노 할아버는 코트에 나가면 1시간은 친다고 했다. 노 할아버지가 속한 ‘100세 정구클럽’은 60대 후반에서 70대까지가 평균연령층이다. 80대도 1명뿐이고 노 할아버지가 최연장자다.

“정구장도 많이 옮겼어요. 효창운동장, 서울고등학교 등지에서 많이 쳤죠. 마장동 뚝섬도 다녔고요. 개발이 되면서 정구코트가 많이 줄어 지금은 삼성동으로 다니고 있어요. 70대 중반까지는 아시아 선수권대회에도 출전했죠. 요즘에는 잘 치는 사람과 팀을 이루면 이기고 아니면 지고 그래요.(웃음) 정구는 건강이 허락되는 한 계속 할 거예요. 나이가 조금 있지만 제가 나가야 클럽 담합에도 힘이 되고요.”

노 할아버지는 삶은 여전히 활기차다.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고 여유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는 100세 정구클럽은 물론 예비역 헌병모임과 이북5도협회 등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사회생활을 즐기고 있다.

“주변에서 100세까지는 끄떡없을 거라고 해요. 제가 느끼기에도 아직은 건강이 괜찮은 것 같고요. 무리한 운동보다는 많이 걸으려고 노력해요. 충정로 집에서 삼성동 정구코트까지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데 계단 오르내릴 때 넘어질까봐 무섭기는 한데 힘들지는 않아요. ”

꾸준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노 할아버지는 규칙적인 식습관과 술담배를 멀리하는 생활습관을 갖고 있다. 혈압조절제와 영양제 등을 정기적으로 복용 중이지만 질병 치료를 위한 약을 먹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영향을 받아서 종교생활을 오래 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가는데 스스로를 낮춰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해요.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것도 조심스러워지고요. 교회에 가면 어려운 사람들은 많이 봐요. 이런 분들을 도와야 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담배는 끊은지 30년 정도 됐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아요.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갛게 돼서요.(웃음)”

아직까지도 노 할아버지는 운전대를 잡는다. 평상시에는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매주 일요일 교회에 갈 때는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 자동차를 직접 몰고 다닌다. 요즘은 교회 다니는 길과 가끔 드라이브를 즐기지만 8년 전 아내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는 병원을 오가느라 매일 차를 운전을 했다. 운전 얘기를 이어가던 노 할아버지는 기자의 시선이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 같이 느껴졌는지 “저 요즘도 운전 잘해요”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노 할아버지는 한국의 현대사를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산 증인이다. 평안북도 산천에서 태어난 노 할아버지는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 경제학을 전공한 뒤 일본군에 강제 징용을 당하기도 했다. 일본 패전 후 한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 육군에 몸담고 한국전쟁도 치렀다. 이후 개인사업과 여러 단체를 통해 사회의 한 일원으로 숨 가쁘게 뛰어왔다. 장성한 4명의 자녀(2남2녀)와 손자손녀, 증손자 등 22명의 뿌리이기도 하다.

“살다보니까 제 자신의 문제도 있지만 주변의 형제 친척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일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오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앞세운 것이 제일 안타까워요. 처와 여동생 셋을 먼저 보냈어요. 먼저 간 자식도 있어요. 그런 아픔이 제일 커요. 이제 애들에게 부담이 안 가는 생활을 하는 게 마지막 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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