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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땀 밴 국방과학연 방문한 박근혜의 다음 수는

박정희의 땀 밴 국방과학연 방문한 박근혜의 다음 수는

기사승인 2013. 05. 22.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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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자주국방 꿈 안고 설립...전두환 정부 와해...박근혜 정부는
22일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한 국방과학연구소(ADD)는 박 대통령의 선친인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지난 1970년 8월 6일 10명 미만의 육·해·공군 과학기술자들을 모아 설립됐다.

박 전 대통령이 ADD를 창립할 무렵에는 자주국방이 절실한 때였다. 북한은 1960년대 들어 국민총생산(GNP) 20% 수준을 군비에 투입했다. 1968년 김신조 등 무장공비를 청와대로 침투해 박 전 대통령 암살을 꾀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으로서는 향토예비군을 결성해야 할 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다.

특히 미국이 주한미군 병력을 감축하려 하고 우리 군은 소총, 철모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전적으로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고 있어 군 장비의 국산화 필요성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창기 ADD 직원들은 산·학계에 무기 국산화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대포나 군함·항공기·미사일·전차 등을 개발한다는 것은 꿈과 같은 얘기였다. 소총·기관총 개발엔 15년에서 20년은 걸리고 통신전자장비는 아예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ADD의 역할은 군복·식품 등을 검사하는 정도에 머물러야 한다는 자문이 많았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1971년 11월 ADD에 ‘번개사업’을 지시했다. 소총·경기관총·박격포·로켓포·수류탄·대인지뢰·대전차지뢰 등을 시험제작하라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과 젊은 과학기술자들은 굴하지 않았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불시에 경호원까지 위장시켜 연구소를 찾아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그 때마다 다그치는 대신 사기를 북돋워 준 것으로 전해진다. 연구진에게는 자녀학자금은 물론 주택, 자동차를 제공하고 김장 보너스까지 주는 등 초특급 대우를 했다. 박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로 ADD를 방문했던 1976년은 이런 시기였다.

ADD에서 축적된 지식과 경험은 이후 한국의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등 국책사업 성공에 크게 공헌했다. ADD는 산업계·학계 연구소에 대한 과학기술 인력 공급처 역할도 했다. 선진국 무기를 보고 배우기 바빴던 한국이 지금은 K-2소총, KT-1 터보프롭 훈련기, K-9 자주포 등을 수출할 실력을 갖췄다. 이런 연구가 모두 ADD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ADD는 1979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시절 큰 시련을 맞게 된다. 이 무렵 전두환 전 대통령은 ADD의 중견급 실무진 30여 명을 모두 해고했다. 해고자 중에는 연구소장 심문택 박사와 한국 최초의 유도탄인 K-2 개발을 주도했던 최호연 박사도 포함됐다.

전두환 정부는 박 전 대통령이 이룩했던 ADD의 실험 시설과 장비를 모두 고철로 뜯어 건축폐기물 트럭에 실어 날랐다. 관련기술 문서도 대부분 불태웠다. 박정희 정부가 국산 미사일과 전략무기를 개발했고, 전두환 정부는 이를 견제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부 이후 ADD는 지속적으로 조직개편, 인력감축이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역사를 가진 ADD를 박 대통령은 22일 36년 만에 방문했다. 후속조치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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