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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의 스포츠人] “강원FC, 우승 도전 해보겠다”

[장원재의 스포츠人] “강원FC, 우승 도전 해보겠다”

기사승인 2024. 09. 2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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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증 강원FC 강화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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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증 강원FC 강화실장 / 장원재 기자
조영증은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중반 한국 축구의 수비를 책임졌다. 한국이 사상 첫 월드컵 승점을 올린 1986년 멕시코 대회 불가리아 전 1-1 무승부의 시작점도 그의 프리킥이다. 그의 발끝을 떠난 공이 조광래의 헤딩 패스를 거쳐 김종부의 오른발슛 득점으로 이어졌다.

- 요즘 근황은.

"강원 FC 강화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대학리그, 15세 경기를 주로 보고 있다."

- 1군 경기도 보나.

"물론이다. 그건 당연히 봐야 하는 거다."

- 현역 때 탈 아시아급 수비수라는 평을 들었다. 좋은 수비수란 무엇인가.

"일단 상황에 따른 인식과 예측 능력이 좋아야 한다. 피지컬도 중요하고 정신적으로는 승리하고자 하는 의욕이 강해야 한다. 공격수보다 투쟁심이 충만해야 한다."

- 한국 최초로 북미사커리그(NASL)에 진출했다. 어떻게 오퍼를 받았나.

"그때는 프로리그가 없던 시절이다. 프로에 가는 건 꿈같은 얘기였다. 차범근이 독일에 진출하고(1978), 그다음에 허정무가 네덜란드에 갔다. 저는 수비수라 유럽에 간다는 것이 무리라고 봤다. 78년 9월 대통령배에 NASL 소속인 워싱턴 디플로메츠가 출전했다. 결승전에서 우리가 6-2로 이겼는데, 이때 활약이 인상적이었는지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미국에서 3년간 뛰었다. 포틀랜드 팀버스(1981~82), 시카고 스팅(1983) 이다."

- 미국은 축구 선진국은 아니었다. 그래도 환경이 한국보다 좋았나.

"시설은 미국이 최고다. 유럽 못지않다. 다만 축구가 미식축구,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 프로리그가 탄탄한 종목에 비해 인기가 떨어졌다."

- NASL은 펠레, 에우제비오, 베켄바우어, 크루이프 등 은퇴 직전의 대선수들을 모두 스카우트해 새로운 시장 개척을 꿈꿨다. 하지만 1984년을 마지막으로 리그가 사라졌다.

"시작은 1968년이다. 그만큼 인지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실패했다. 내부적으로는 FIFA와 다른 룰을 적용한 것도 문제였다고 본다. 하프라인과 페널티에어리어 중간의 오프사이드 라인, 승부차기를 PK 대신 아이스하키 식 슛오프로 하는 것 등이다."

- 지금 메이저리그 사커(1993~)는 어떻게 보나.

"세계 정상권 리그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 현역 시절 본인이 꼽는 명 경기는?

"1980년 아시아 선수권대회에 북한과의 준결승전이다. 0-1로 지다가 80분, 89분 정해원이 2골을 터뜨려 역전승했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결승전 잠실에서 사우디를 2대 0으로 이긴 경기도 기억에 남는다."

- 북한은 예나 지금이나 매너가 거칠다.

"북한의 최근 경기를 보니 한숨이 나온다. 지난 월드컵 우리와의 평양 예선전도 격투기처럼 플레이하고, 아시안게임 일본과의 경기 때는 북한 선수가 일본 스태프의 물병을 빼앗고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나. 그건 축구가 아니다. 한 경기 이기는 건 몰라도, 그런 식이면 장기적인 축구 발전은 불가능하다. 정도(正道)가 아니기 때문이다."

- 1986 멕시코 월드컵은 어땠나.

"32년 만에 출전해서 선수단 전체가 다 허둥댔다. 그래도 아주 창피를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전체적인 팀 분위기가 있어서 나름대로 선전했다고 본다(1무 2패)."

- 그때 한국 선수들이 직접 빨래하는 걸 보고 외국 관계자들이 경악했다는 얘기가 있다.

"지금과 비교하면, 말은 프로지만 프로다운 여러 가지 조건이 미비했다. 그래도 선수들이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자는 사명감에 불탔던 시절이다."

-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때는 아시아 오세아니아에 출전권이 1장이었다. 우리가 2위로 아깝게 떨어졌다. 그때 주전 수비수였다. 백넘버는 8번. 그때 월드컵 나갔으면 역사가 좀 달라졌을까.

"제도나 선수 수급이나 훈련 방법이나 인프라나 모든 게 달라졌을 수 있다. 그래도 86년을 기점으로 2002년 월드컵도 유치하지 않았나. 월드컵 유치를 계기로 훈련 시설, 경기장 인프라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 1984년 럭키금성(현 FC 서울) 창단 멤버로 귀국한다. 미국과 가장 차이가 난다고 느꼈던 점은.

"의무 시설이다. 스포츠 테이핑은 제가 처음 도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 강원 FC는 금년 시즌 선두권을 달리고 있다. 예상하는 최종 성적은.

"시즌 개막 전엔 이렇게 잘하리라고는 예상 못했다. 일단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으니 도시민 구단으로서 우승 한번 해보고 싶다."

- 구단주인 김진태 도지사는 많이 후원해 주나.

"홈 경기 전 경기를 다 직관한다. 선수들이 힘을 많이 받는다. 한번 해보자고, 선수단 전체의 의지가 충만하다. 강원 FC가 금년에 어디까지 날아오를지 관심가지고 지켜봐 달라."

△ 조영증은...
1958년생. 중앙대, 제일은행(1977~80), 해군(1978~79), 포틀랜드, 시카고, 럭키금성(1984~87)에서 선수로 활동했다. LG 치타스(1994~96), U-20 대표팀(1998~2000) 감독을 거쳐 국제축구연맹 기술위원(2002~05), 한국프로축구연맹 기술위원장(2013~20)을 역임했다. 국가대표(1975~86)로는 102경기 출장, 1골을 득점했다. 1978년 월드컵 예선 쿠웨이트와의 원정 경기 선제골이다(결과는 2-2 무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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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증 강원FC 강화실장 / 장원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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